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국충 (문단 편집) == 생애 == [[측천무후]]의 충신 [[장역지]]의 사위로 학문에는 자질이 없었고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데만 밝았다. 그는 젊어서 군인에 종사하였다. 그러다가 검남절도사 [[장구겸경]][* 토번과 남조국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해 토번의 요새인 안융성을 계략으로 점령한 자이다.]이 요좌로 입경하자 현종은 양소를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했다. 왕홍(王鉷)을 모함해 관직에서 몰아내고 그를 대신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고, 경조윤(京兆尹)을 겸했다. 750년, 양옥환이 귀비가 되자 현종은 양소에게 `국충`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양국충은 [[이임보]]와 연합하여 [[관롱집단|세족(世族)]]을 정계에서 몰아내었다. 이에 양국충은 현종에게 신임을 얻게 되고, 이후 이임보와 암묵적인 대립을 이루었다. 752년, [[당나라]]의 실질적인 1인자로 군림했던 이임보가 사망하자 양국충은 뇌물로 인사를 교란시키고 정계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또한 우상에 올라 문부상서를 겸하여 관직 40여 개를 독점했다. 의기양양한 양국충은 선우중통(鮮于仲通)[* 이름은 향, 자는 중통]을 천거해 익주장사로 삼고 군사를 내어주어 남조를 공격했다. 그러나, 60,000여 명의 당군이 궤멸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선우중통은 이를 승전으로 허위 보고하나, 이후 그 사실이 밝혀져 실각하고 만다. [[두보]]가 선우중통의 패전 사실이 밝혀지기 전, 선우중통을 칭찬하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754년, 양국충은 또 다시 이복(李宓)에게 군사를 내주어 남조를 공격하게 하나 또 대패함으로써 [[천보전쟁]]에서 당군은 약 20만 명의 군사를 잃게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남조]]가 반당 정책으로 당을 배척하고 [[토번]]과 연합하는 초유의 사태를 초래하였다.] 그럼에도 양국충은 이 사실을 현종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관직을 독점해 사리사욕을 채우고 뇌물로 조정을 전횡하는 데에 골몰하였다. 이후 양국충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모함을 했는데 결국 755년 [[안록산의 난|안록산이 하북에서 난을 일으켰다]].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 제거를 명분으로 삼고 [[시안(도시)|장안]]으로 진격했다. 이에 양국충은 안이하게 생각했다. 조정회의에서 그는 곧 안록산의 수급이 장안으로 도착할 것이라고 하며 낙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낙양에서의 방어작전은 실패하고, 양국충은 인망을 잃어 양국충에게 책임을 물려야 한다는 여론이 갈수록 타오르고 있었다. 위험을 느낀 양국충은 낙양 다음의 거점인 동관을 수비하는 [[가서한]]을 견제했으나 실패를 거듭해 입지만 좁아졌다. 그러나 현종을 움직여 가서한이 동관을 나와 안녹산을 요격하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는데, 이 결정은 조기에 끝날 수도 있었던 [[안사의 난]]을 연장시킨 큰 실수였다. 가서한의 병력은 수만 많았지 훈련이 되지 않은 오합지졸이라 가서한도 동관에 틀어박혀서 병력을 훈련시키고 있던 차였는데, 이런 병력으로 안녹산의 정예군을 요격한 결과 동관까지 뚫렸고 장안은 풍전등화가 되었다. 자기를 위해 나라를 파국으로 인도한 양국충은 현종에게 촉으로 피난 갈 것을 요청해 이를 승낙받고 장안을 버려 현종과 함께 [[쓰촨 성|촉]]으로 피란을 갔다. 그러나 피난 가는 도중 장안의 백성들을 버리고 황제와 자신의 일족들만을 데리고 갔으며 [[마외역]]에서 보급품 문제로 비난을 받는다. 결국, 그를 증오하는 장군 진현례와 병사들이 들고일어났으며 양국충은 그들에게 처형당했다. 진현례와 병사들은 처형당한 양국충의 [[거열형|사지를 가르고]] 그의 [[효수|머리를 잘라 마외역 문 밖에 내다 걸었다]]. 이 사태의 여파로 어사대부 위방진, 양귀비와 그녀의 언니들인 한국 부인과 진국 부인도 모두 자결하거나 처형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