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동마을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 [[현대]] ===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은 이 마을의 지형이 ‘물([[勿]])’자 모양의 길지여서 [[풍수지리]]에 입각한 우리의 전통 사상과 우리 강산의 기(氣)를 흐리게 하기 위해 1913년에 마을 정면에 양동초등학교를 세워 마을 지형을 ‘혈(血)’자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또한 일본인들은 여기서도 철길을 마을 앞으로 지나가도록 만들었다고 한다지만 일본은 풍수지리라는 개념 자체를 아예 몰랐으므로 그냥 풍설. 자세한 것은 [[일제풍수모략설]] 참조. [[1984년]] [[12월 24일]]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 189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7월 31일]]에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안동시]] [[하회마을]]과 함께 [[대한민국]]의 10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덤으로 인근 독락당과 [[옥산서원]]도 함께 등재.[* 옥산서원은 [[2019년]] [[7월 6일]]에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여담으로 이와 비슷하게 세계문화유산에 중복 등재된 곳은 [[류성룡]]을 배향한 안동의 [[병산서원]].] 특히나 [[2013년]]에는 [[유네스코]]가 1972년 선포한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이 2012년 40주년을 맞아 세계 160여 나라에 산재한 981점의 [[세계유산]] 전체를 대상으로 심사한 결과 세계유산의 핵심정신인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장 잘 구현한 26개 사례 가운데 하나로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양가의 후손들은 몇 개의 분파로 갈라져 대를 이으며 오늘까지 양동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오고 있으며, 양가는 지금까지도 상호통혼을 통하여 인척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마을 관리에도 신경을 써서 지금은 후손들에 의해 마을 건물들의 방향도 남향에서 동향으로 옮겨지는 등 전통적인 형태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