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동마을 (문단 편집) === 물봉골 === || 사진 || 설명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양동마을 무첨당.jpg|width=100%]]}}} ||'''무첨당'''[br] [[대한민국의 보물]] 제 411호. [[1510년]] 경 지어진 회재 [[이언적]]의 종가(宗家) 종택(宗宅)이다. 현재 종손은 17대 종손인 이지락(李址洛)씨. [[이언적]]이 1508년 정경부인 [[함양 박씨]]와 혼인하고 1510년 외조모 풍덕류씨가 별세하면서 받은 유산으로 분가하면서 지었고, 이후 이언적 종가 종택이 되었다. 엄밀히 무첨당이라 하면 ㅁ자 모양의 대규모 살림집(안채), [[이언적]]과 정경부인 [[함양 박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 그리고 무첨당이란 이름의 별당 등 총 세 채를 모두 합한 것이지만 [[대한민국의 보물|보물]]로 지정된 건축물은 이 별당이다. 별당은 종손의 학문 수련, 손님 맞이, 문중 회의, 그리고 대제(大祭) 등의 공식 행사에 사용된다. 대제는 [[의정부]] 좌찬성에 올라 [[영의정]]에 증직되어 [[종묘]]의 [[명종(조선)|명종]]실에 배향되고, 한국 [[성리학]] 최초의 체계적인 저술을 남겨 영남학파와 [[남인]]의 태두로 추앙되며 [[성균관]] [[문묘]]에 종사된 회재 [[이언적]]의 국불천위(國不遷位) 제사로 음력 [[11월 23일]]이다. 무첨당(無忝堂)이라는 당호는 [[이언적]]의 적장손인 이의윤(李宜潤, 1564-1597)의 호로 훌륭한 조상에게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겠다는 뜻이다. 그는 일찍이 가학을 전수받고 한강 [[정구(조선)|정구]]의 문인이 되었으며 과거시험의 1차 관문인 향시에도 합격했으나 불행히도 그 해 [[임진왜란]]을 맞았으며, 아버지인 수암공 이응인 상을 당하여 정성을 다해 상을 마쳤고, 또 이어 둘째 동생인 양졸당 이의징이 죽자 정성으로 상복을 입었다. 이후 몸이 쇠하여 1597년 34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후손들은 무첨당파를 형성하여 [[여강 이씨]] [[이언적]] 계열의 대종가를 형성하고 있다. 이밖에도 종손 이원상(李元祥, 1762-1813)을 포함해 이재직(李在直, 1805-1837), 이능섭(李能燮, 1812-1871) 등 3대가 태어났고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능섭은 [[흥선대원군]]의 비호 하에 [[갑술환국]] 이후 [[영남]] [[남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고, [[경주시]] 태생으로는 최초로 종2품 경주부윤에 봉직했으며 이조참판 등에 올랐으나 병으로 죽었다. 경주부윤이나 일제 시대 월성군수가 새로 부임하면 반드시 예방하던 장소였고 이밖에도 수많은 명사들이 찾던 곳이었다. [[파일:무첨당 좌해금서.jpg|width=530&height=200]] [[흥선대원군]]은 집권 전 무첨당을 방문하여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죽편을 남겼다. '좌해'란 한양의 왼쪽 즉 [[영남]]을 말하며 '금서'는 거문고와 서책으로 정신문화와 지식을 상징한다. 영남의 대표 가문이란 소리다. 지금은 도난 위험으로 사본을 걸어놨다. [[파일:무첨당 물애서옥.jpg|width=530&height=200]] 다른 한편 [[청나라]] 형부상서를 지낸 문신이자 명필로서 [[조선]] 사신이기도 했던 문각공(文恪公) 조광(趙光, 1797-1855)은 [[경복궁]]과 [[창덕궁]] 낙선재 등 여러 조선 궁궐 건물에 현판을 남겼는데, 이능섭의 부탁 등을 겸해 물애서옥(勿厓書屋)이라는 현판을 남겼다. '물애'는 무첨당이 위치한 물봉골이며 '서옥'은 학문하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조선 제일의 반촌 중 하나라는 점을 상징한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