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림역사문화마을 (문단 편집) == 역사 == [[조선시대]]부터 양림산을 배후로 하여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며, [[광주읍성]]과 가까웠던 지리적 위치 덕분인지 양반들도 살았던 동네 중 하나라고 한다.[* 양림동과 인접한 사동, 구동, 서동 부근에도 양반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4년부터 미국의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기독교계에서 합의를 통해 선교지를 나눠서 선교활동을 했다고 한다. 광주와 전라도 일대에는 남장로교가 선교활동을 하기로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부터 서양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아 '서양촌'이라고도 불리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이 양림동에 자리잡은 이유는 중심지인 [[광주읍성]]이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땅값이 싼 편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양림산이 조선시대부터 대나무숲이 울창해 관청에서 관리하던 곳이라 인구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또한 광주 지역 부자들이 살기도 했던 부촌이었는데,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에 뜻있는 지식인들도 많이 들어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광주 근대 역사의 시작이라는 크나큰 상징을 가진 마을이었지만, 양림동의 이러한 과거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조금씩 잊혀졌다. 하지만 광주시의 관광지가 부족하다는 것이 오히려 이 마을을 다시금 주목하게 만들었는데, 조선시대부터 2000년대까지 100여년의 세월이 남아있는 마을이라는 점을 살려 관광지로 만들려는 계획이 2008년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적절한 계획이 만들어지지 못해 오히려 과거 모습이 훼손되고 사라져버렸다는 비판도 따랐다. 그래도 광주 지역에서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시기의 근대 문화유산을 많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라는 점 덕분인지 2010년대 중반부터는 관광지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충장로, 금남로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광주의 중심이라는 점 때문에 예전부터 개발이 잦아 오히려 1950년대 이전의 옛 모습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찾기 힘든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