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명학 (문단 편집) == [[일본]]에서의 양명학 ==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 양명학이 전해졌으나, 막부에서 관학으로 성리학을 밀어 줬기 때문에[* 다만 일본에는 [[과거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 성리학만큼의 사상적 구속력은 적었다.] 에도 시대에는 비주류 학문에 머물렀다. 물론 기독교만큼 가혹하게 탄압하지는 않았으나, 막부 차원에서 양명학 금지령을 몇 차례 내렸던 적은 있었다. 막부의 백안시와는 별개로, 양명학은 창시자부터가 무인이었던 탓에 그 실천주의적인 풍모가 사무라이들의 취향에 맞았던 데다, 불교와의 유사성 때문에 승려와 쵸닌 계층 중에서도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많았다. 에도 시대에 양명학을 연구한 일본의 유학자는 [[요시다 쇼인]]과 오시오 헤이하치로(大塩平八郎. 1793~1837)가 유명하다. 오시오는 덴포 대기근(1833~1837) 때 현지 관리의 수탈 때문에 일어난 [[잇키]]를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자살하였다. 요시다 쇼인 역시 반정권운동을 계획하다가 사형당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이노우에 테츠지로(井上哲次郞, 1855~1944)와 타카세 타키지로(高瀨武次郞, 1868~1950)가 근대 천황제에 필요한 이론적 기반을 위해 양명학을 연구했다.[* [[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94280/1/1_%ec%9d%b4%ed%98%9c%ea%b2%bd.pdf|참고: 박은식의 양명학 해석 : 다카세 다케지로와의 차이를 중심으로]] /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research.html?dbGubun=SD&m201_id=10014540|참고 2: 양명학과 일본의 근대화 : 이노우에 데츠지로(井上哲次郞)와 다카세 다케지로(高瀨武次郞)를 중심으로]]] [각주] [[분류:유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