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양무운동 (문단 편집) === 총론 === 30년간의 근대화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청의 자강 운동은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는 [[청일전쟁]]의 군사적 패배, 대내적으로는 보수파의 구심점 [[서태후]]의 건재와 [[변법자강운동]]의 실패로 총체적 난국에 들어서게 되고, 결국 [[의화단의 난]]과 [[신해혁명]]을 겪으며 안팎으로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청의 근대화 노력은 패전 이후에도 [[20세기]] 초, 즉 [[1900년대]]까지 지속되면서 지방의 토착 자본과 지식층을 깨우고 신해혁명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당장 신해혁명도 당장 늘어나던 철도를 정부와 민간 중 누가 운영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촉발된 것이니 근대화의 성과가 완전하게 부정되기는 어렵다. 군사기술도 서양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륙의 기상]]이라고 한번 모방이라도 시작하니 제법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냈다. 이때 도입된 각종 철도와 기관, 학술정보, 각종 산업기술력 등은 중화민국 때에도 근대화를 앞당기는 촉매가 되었다. 황금 10년의 원동력이었고 더 크게는 상당수의 자본 역량이 1949년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옮겨갈 때 동행해 대만 경제의 기초가 되었다. 중앙과 지방에 세워진 대학과 군사학교들은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중국과 인근 국가들의 인재들을 양성하는 산실이 되었다. 바오딩 육군군관학교, 운남강무당, 귀주강무당 등에서 길러낸 군인들은 중국 내전과 중일전쟁, 국공내전을 거치며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장성들로 성장한다. [[한국]]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이 군사학교들에서 수학한 이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리고 양무운동 시기에 기틀을 놓은 [[타이위안 병공창]]이나 한양 병공창, 상하이 강남제조소 등의 군수공장들은 군벌 내전 당시에도 점진적으로 확충되었으며, 1930년대를 거치며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중국군의 현대화에 일익을 담당했다. 이들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중국 [[방위산업체]] 및 [[중공업]] 회사들의 전신으로 기능하는데, 상하이의 장난조선소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 조선소는 1865년 세워진 강남기기제조총국의 조선 부문으로 시작하였다. 청군과 국민혁명군에게 무기와 함선을 납품하는 주요 군수공장이자 조선소였으며, 서구의 기술과 군사 서적들을 번역하여 중국에 소개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함선의 경우 중화민국 시기에는 [[융펑급 해방함]]과 경순양함 [[이셴]]함, 그리고 [[닝하이급 경순양함]] 핑하이를 건조했다. 이 회사는 중국선박그룹 소속으로 현재에도 운영 중이며, LNG선 등의 건조에 투자하면서 [[대한민국]]의 조선 산업과 호각으로 경쟁하고 있다. 현대 중국 해군의 주력함인 [[052D형 구축함]]과 최신예 항공모함인 [[003형 항공모함]] 또한 여기서 건조하고 있다. 현대 중국의 군사적, 산업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양무운동을 단순히 실패했다고 폄하할 수는 없다. [[중화제국]]으로서의 청나라에게는 자체적 모순을 가진 실패한 근대화였다고 평할 수 있다. 문제는 양무운동이 막대한 세금을 필요로 했고 무엇보다 지배 계급이었던 만주족에 대한 증오가 사라지지 않았다. 신해혁명이 닥치자 만주족이 한족에게 학살당했을 정도다. 일관성의 부족 또한 병크까진 아니었다. 사실 중국과 유럽을 비교해 보면 근대적 요소가 많이 나타난 만큼 어디를 손대야 할지 몰랐던 것이 더 정확하다. 그래도 이렇게 중구난방으로나마 일찌감치 근대화를 시작한 덕에 각종 반동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여러 지역에서 크고 작은 영토를 뺏길지언정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무굴 제국]]등과는 달리 전 국토를 서양 강대국들에게 난도질당하는 것만은 면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실패했다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