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무호 (문단 편집) === 도입 비사 === 원래 [[고종(대한제국)|고종 광무제]]는 일본에서 군함을 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황실 비자금을 통해 [[독일]]과 [[영국]]에서 근대식 [[군함]]을 새로 주문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접근했을 정도로 군함 군함 도입에 노력을 기했다. 하지만 정작 독일과 영국 측에서는 한국의 도입의사를 단칼에 거절했고, 설상가상으로 한일병탄을 꾀하던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함 도입 계획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곧장 훼방을 놓아 군함 구입 계획을 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비자금 전달책인 [[이동인]]을 암살했는데 일본에 의해 소리소문없이 실종되었다는 말도 있다.] 결국 어느 쪽으로든 새로운 근대식 군함을 얻을 방법은 막혀버렸기 때문에 일본의 의도대로 끌려갈 수 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독립신문 등에서도 고종이 근대식 군함을 들이려 하고 해군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두고 나라 기반은 생각하지도 않고 방위비를 과도하게 쓴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고종이 그렇게 해군력을 중시하게 된 이유는 있었다.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 때 서양의 근대식 증기 군함들이 쳐들어오고 이로 인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의 외세의 위협을 목도하면서 "적어도 근대적인 해군력은 있어야 나라 구실을 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어떻게든 자기 재위 안에 근대식 증기 군함을 도입하고 해군의 틀을 양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애시당초 [[운요호 사건]]만 해도 고작해야 소형 [[초계함]]인 [[운요호]]에게 농락당한 사건이었다. 결국 해군을 포기한 해안방어의 맹점을 일본이 파고든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기동전력이 필수적이었지만 현실은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면 "왜 자체적으로 개발하지 않고 사오려 하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고종은 16세 때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장인을 불러모아 특명을 내려 근대식 외륜증기선을 제조하고 운행한 결과를 확인한 적이 있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서 만들어진 책 <해국도지>와 <화륜선도설>을 통해 화륜선과 증기 기관의 설계도를 배운 상태였고 이를 통해 한선 몸체에 외륜과 증기 기관을 장착한 배를 몇 척 건조하기도 했다. 고종은 그때부터 제대로 기술을 들여온다든지 하는 게 아니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여 아예 근대식 군함을 서양에서 도입해 오는 방식으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사실 조선업의 높은 진입장벽을 생각하면 이렇다 할 기술적 기반이 전무한 상황에서 단기간 내에 자체 개발은 불가능했다.[* 이보다 수십 년 뒤인 [[울산급 호위함]]의 시멘트 사례만 봐도 군함 건조기술은 쉽게 축척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 해군]]과 한국 조선업체들은 [[참수리급 고속정]], [[포항급 초계함]] 등을 건조하면서 각종 조함 규정과 매뉴얼, 노하우들을 장기간 계속 쌓았기 때문에 현재 대한민국 해군의 기틀과 한국 조선산업의 토대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당시 외세의 위협이 가시화된 상황에서 외부 기술 도입선도 없던 대한제국에서 조선업을 발전시키기란 어려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