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봉(삼국지) (문단 편집) === 밀려난 이후 === 건안 2년인 [[197년]] 무렵 양봉은 [[공손찬]], 원술, 한섬과 함께 현상금이 걸려 체포대상이었는데 이 와중에 원술은 황제참칭을 감행한다.[* 《[[영웅기]]》 ; [[배송지]] 주석, 《삼국지》7권 위서 제7 여포에서 인용했다.] 서주의 [[여포]]는 [[진규]]와 조조의 꼬드김에 넘어가 진행되고 있던 혼담을 끊어 원술과 관계를 단절하니 원술은 화를 내며 [[장훈(삼국지)|장훈]], [[교유]], 양봉, 한섬으로 하여금 일곱 길에서 수만 명으로 서주를 쳤다. 이에 여포는 양봉과 한섬에게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장군이 어가를 호송하며 동쪽으로 온 것은 나라에 제일가는 공이오. 당연히 역사에 남아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오. 원술은 반역하여 토벌받아야 마땅한데 어찌 역적과 한패가 되어 나 여포를 친단 말이오? 나 여포 또한 [[동탁]]을 주살한 공신이오. 힘을 합해 원술을 격파하고 천하에 공을 세웁시다. 라 하였다. 또 노획한 군수물자도 전부 주겠다고 하니 마침내 내응하기로 했다. 여포가 진격하여 장훈과의 [[거리]]가 100보쯤 되었을 때 한섬과 양봉도 동시에 장훈군을 타격하였다.[* 《[[구주춘추]]》 ; 배송지 주석, 《삼국지》7권 위서 제7 여포에서 인용.] 배신을 당한 원술군은 죽고 다치고 물에 빠진자가 수두룩했고 결국 궤주했다.[* 《후한서》75권 열전 제65 여포.] 이후 양봉과 한섬은 여포와 같이 구강군 수춘현(壽春縣) 방향으로 수륙병진하며 지나는 곳마다 노략하고 종리현(鍾離縣)에서 [[회하]] 북쪽으로 회귀하기도 하는 등 서주와 양주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그러던 차 양봉은 [[유비]]와 회견할 일이 있어 갔다가 붙잡혀 죽었다.[* 이 일은 《삼국지》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엔 196년의 일로 잘못 삽입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