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성지 (문단 편집) == 생애 ==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초기 [[집현전]] 학자들 중 하나이다. 세조 ~ 성종 시기 [[팔도지리지]]와 [[동국지도]]를 완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앞의 서적들에서 보듯 지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병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에 신중하게 생각하여 자주적인 국가를 만들자는 사상을 지녔다. [[세조(조선)|세조]]에게 상소를 올려 [[환구단]]에서 [[제사]]를 올리게 한 인물이며, 세조를 시작으로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환구단에서 제사 지내지 않은 왕이 없을 정도다. 특히 이는 국방 사상에 영향을 주어, 조선 전기의 대표적 군사 체계인 [[진관 체제]]를 만들게 된다. 이는 조선 후기의 실학과 맞닿아 [[정조(조선)|정조]]의 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집현전 학사 시절에는 [[고려사]]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의학서인 [[의방유취]]를 편찬하는데도 기여한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다재다능 문신이다. 특히 그의 사상은 시대를 앞서나간 면이 있었는데, [[백정]]이 양민이 되는 길을 열어주자거나, [[의창]]과 같은 사회 복지 제도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를 관청 옆이 아니라 산간 깊숙한 곳으로 옮겨 외적의 침입으로 소실되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130년 후 그의 주장이 [[임진왜란|현실화]][[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되고 말았다]]. 이후 지방에 새로 설치된 사고는 모두 산속에 자리했다. 다만 조선 중기에는 폄하되는 면이 있었는데, 그의 가문이 이후 [[훈구파]]로 분류되기도 하였으며, 이 때문에 [[사육신]]의 충절을 존숭하는 분위기의 조선 중후기에는 [[사림]]파에 의해 비난받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세조(조선)|세조]]에게 아부했다는 이유로 자주 탄핵되곤 했으며, [[청백리]]라고는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외가 4대손으로 [[원균|자손]]을 잘못 두기도 했으나 정조가 양문공예외보를 내도록 할 만큼 뛰어난 인물도 많다. 한명회, 신숙주, 권람 같은 네임드들을 제치고 바로 그 제갈량에 비유된 흠좀무한 인물임에도 어째 사극에서는 코빼기도 안 보인다. 한명회, 신숙주, 권람의 이미지가 너무 후덜덜해서 양성지가 누군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다. 양성지 묘역 및 신도비는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대포리에 있다. [[https://www.doopedia.co.kr/photobox/comm/community.do?_method=view&GAL_IDX=10101200073521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