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세봉 (문단 편집) ==== 이후 ==== 양세봉이 순국한 이후 [[김호석]](金浩石)이 총사령에 취임하였으나 조선혁명군은 급격히 세력이 위축되어 소규모 유격전으로 겨우 독립군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당시 점점 몰락하는걸 막기 위해서 조선혁명군은 군 중심의 조선혁명군정부로 재편하지만 조선혁명군의 몰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34년 양세봉이 사망한 이후 1936년 정신적 지주이자 당을 이끌던 고이허가 잡히면서 조선혁명군의 상황은 나빠졌다. 그러자 총사령이었던 김활석은 한인들이 많았던 공산주의 부대인 [[동북항일연군]]이랑 연대해서 일본 군경에 대항하면서 근근히 버틴다. 1937년 3월 조선혁명군은 평안북도 건너편에 튼튼한 산채를 구축하고 국내로 진공하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이걸 일본 군경이 알아차린다. 일본 군경은 이참에 조선혁명군을 뿌리뽑으려고 경찰, 관동군 정보 기관, 군용기까지 투입하면서 본부를 공격한다. 김활석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은 1000m 고지에 있던 요새로 들어가 저항했으나 결국 일본군과 만주군의 화력에 밀려 10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퇴각하게 된다. 이러한 공격에 조선혁명군은 본부와 그동안 구축했던 산채 및 요새들을 잃었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데 1사 사령인 한검추와 그의 병사들에게 일본 경찰이 회유 문서를 보내서 50여 명이 결국 항복했다. 이후 약 150명 정도로 줄어든 조선혁명군을 당시 사람들이 '광간사령'이라고 불렀는데 뜻은 '가지 없는 [[나무]]'로 병사 없이 간부만 있는 조선혁명군을 지칭하는거였다. 이후 조선혁명군은 70명 정도로 병력이 더 줄었는데 조선혁명군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동북항일연군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몇몇 인사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으로 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사령인 김활석은 조선혁명군의 [[역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교전 끝에 일본군에게 [[항복]]한다. 훗날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양세봉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1974년 10월 17일에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양세봉의 허묘(墟墓)를 조성했다. [[북한]]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동 [[애국렬사릉]]에도 양세봉의 무덤이 있는데 허묘(墟墓)가 아니라면 중국 만주에 있었을 유해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우호 국가인 북한에 보내준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양세봉장군묘비.jpg]] 북한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양세봉 장군의 묘비. 북한에서는 두음 법칙을 적용허지 않으므로 '''량세봉'''으로 표기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