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세봉 (문단 편집) === 대한통의부 장교 활동 === 1922년 8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을 비롯하여 대한광복군 군영(大韓光復軍 軍營), 대한광복군 총영(大韓光復軍 總營), 평안북도 독판부(平安北道 督瓣府) 등 8단 9회의 대표들이 중국 환인현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 한족 통일 회의'를 개최하여 남만주의 각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하였다. 대한통의부는 총장(金東三), 부총장(蔡相德) 아래 민사, 교섭, 군사, 법무, 재무, 학무, 실업, 권업, 교통, 참모의 10부를 두었으며 부 밑에 국을 두고 비서과와 사판소를 설치하여 남만주 지역에서의 민, 군정을 통합한 [[독립]] 정부 형태를 갖추었는데 이 때 대한통의부 의군 산하 제3중대(중대장 최지풍)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겨울에 [[의주군|의주]](義州), [[삭주군|삭주]](朔州), [[구성시|구성]](龜城)의 경계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천마산대(天麻山隊)에 가입하여 창성군 대유동(大楡洞) [[경찰서]], [[금광]] 사무소와 영림창을 기습해 '''군수 물자와 [[금괴]] 등을 노획'''하여 군자금으로 충당하였다. 1923년 초 천마산대에 대한 일제의 [[토벌]] 계획(討伐計劃)으로 [[독립군]]의 근거지는 물론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게 되자 국내에서는 더이상 활동이 불가능하여 대장 최시흥은 천마산대를 이끌고 만주 유하현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천마산대는 그 곳에서 무장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과 합류하여 광복군철마별영(光復軍鐵馬別營)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때 동영(同營)의 '''검사관'''으로 임명되어 불량한 병사들을 선도하는 등 군기 확립에 진력하는 한편 [[훈련]]을 강화하여 의용군을 정규군 수준으로 끌어올리자 총영장인 [[오동진(독립운동가)|오동진]] 장군으로부터 크게 신임을 받았다. 1923년 5월에는 평안북도 [[창성군]](昌城郡), [[초산군]](楚山郡) 판면(板面), [[의주군]](義州郡) 고령(古寧) 영산(永山) 일대의 경찰서와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수십 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23년 8월 독립운동 방략의 대립으로 대한통의부가 의군부로 분할되자 통의부의 의용군 소속 제 1, 2, 3, 5 중대를 주축으로 하여 환인현 마권자에서 [[참의부]]를 조직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에서는 참의부를 군사 단체로 인정하여 압록강 연변과 중국의 집안현(輯安縣)을 중심으로 무송(撫松), 장백(長白), 안도(安圖), 통화(通化), 유화(柳河) 등의 [[동포]] 사회의 민정과 군정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참의부는 국내 진입 작전을 통해 활발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참의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참의부 소속 제3중대 소대장으로 임명된 양세봉은 1924년 5월 16일 평안북도 초산군 성남동(城南洞), [[강계군]](江界郡) 고산하(高山河)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하여 수 명의 적을 사살하였으며 일제 침략의 원흉인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국경]] 지역인 압록강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자 5월 19일 참의부 제2중대 제1소대(소대장 한웅권)와 합세하여 일제의 경비가 미치지 못한 만주 쪽 강변인 마시탄 [[절벽]]에 정예병을 배치하고 사이토 마코토가 국경 순시차 압록강 경비선을 타고 지나갈 때 [[사격]]을 지휘했다. 경비선이 다가오자 사격이 시작되었으나 의외로 사거리가 너무 멀어 경비선은 빗발치는 탄환을 피해 전속력으로 도주했다. 결국 '''[[조선 총독]] 처단은 미수'''에 그쳤지만 한국 독립군의 정보력과 실행력으로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작전]]이었다. 사이토 마코토가 3.1 운동 후 소위 [[문화통치]]라는 미명으로 한국 통치에 대하여 거짓 자랑만 하고 있었으니 그에게 [[경고]]가 되었음은 물론 대내외에 한국 독립군의 활동을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192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츠야 미야마츠(三矢宮松)와 만주의 봉천성 경찰청장 간에 소위 [[미쓰야 협정|미쓰야 협정(三矢協定)]]이라는 재만한인취체법(在滿韓人取締法)을 체결하게 되었고 중국 당국은 독립운동을 탄압할 의무를 갖게 되어 독립군 활동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1924년 6월 참의부 소대원을 이끌고 평안북도 [[강계군|강계]]와 [[위원군|위원]]에 진입하여 '''일제 경찰대와 교전'''하였으며 1924년 말 '''참의부 제3주대장'''으로 [[승진]]하여 남만주 화전현(樺甸縣) 일대에서 항일 무장 활동, 부일배(附日輩) [[숙청]]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또 1924년 7월 통의부 사령장 겸 군사위원장 [[신팔균]] 장군이 왕청문(旺淸門) 이도구(二道溝) 밀림리(密林里)에서 무관학교 관병들을 훈련시키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 떼들이 급습하여 위기에 몰리자 양세봉은 대원들과 함께 신속히 구출 작전을 펼쳐 엄호 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신팔균 장군 등 수십 명의 독립군들이 전사하는 비운을 겪게 되어 [[통의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