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세봉 (문단 편집) === 정의부 장교 활동 === 1924년 7월 [[길림]]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를 개최하여 대동단결에 합의를 보고 1924년 11월 25일 통의부를 비롯하여 대한군정서, 길림주민회, 의성단 등 10여 개 단체의 대표인 [[김동삼]](金東三), 고활신, 이진산(李震山), 이천민(李天民), 김호, [[이장녕]](李章寧) 등 25명이 회집하여 김동삼을 의장으로 선출한 후 협의를 거듭한 끝에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였다. 이때 정의부는 지역, 군사, 재정, 행정, 교육, 사법 등 모든 부문을 [[국가]] 체제에 준하여 조직하였다. 정의부가 성립된지 1년이 못 되는 1925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선임된 [[이상룡]](李相龍)은 재만(在滿) 독립운동 지도자인 오동진, 김동삼, 윤세용, [[이유필]](李裕弼), [[김좌진]], 현천묵 등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3부 대표자를 고루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로 입각시키게 됨에 따라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해야 한다는 독립운동상의 실리론(實利論)이 대두되어 정의부의 내분이 표출되었다. 이에 1926년 1월 중앙회의 상임위원장 이해룡(李海龍)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비상 [[의회]] 격인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를 개최하여 새로운 헌장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새로운 중앙 의회와 행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정의부는 남만 지방에 있어서 [[공화정]]체를 뚜렷이 한 한족행정부(韓族行政府)로서 기반을 굳혔다. 1925년 11월 양세봉은 '''정의부 제1중대장'''에 임명되어 일제 군인과 경찰 등을 제거하는데 앞장서 활약하였다. 당시 [[중국 국민당]]은 [[국공합작]]에 의하여 [[통일]] 전선이 형성되고 국내에서는 좌우익의 통합체인 [[신간회]]를 결성하는 등 연합 전선을 추진하는 통합 운동이 일어나자 만주 지역에서도 정의부를 주축으로 하여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15일간 중국 화전과 반석 등지에서 18개 단체의 대표 39명이 참석하는 전민족유일당조직회의(全民族唯一黨 組織會議)를 개최하였다. 이때 화전현에서 정의부의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약하고 있던 양세봉은 '''정의부 대표'''로 유일당 조직회의에 참석하여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새로 결성하였으나 청년 동맹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민족유일당 촉성조직동맹(당시 [[공산주의]]자와 연계되어 있었음)의 비협조로 유일당 조직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후 1928년 9월 길림 근방 신안둔(新安屯)에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대표가 모여 3부 통합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