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수청 (문단 편집) == 숯구이, 권력의 핵심에 오르다 == 태평천국은 계속되는 압박에 영안성을 탈출했고, 양수청 역시 따라나섰다. 태평천국군은 [[구이린|계림]] 공략 실패, 전주(全州)[* 현재 취안저우 시] 점령 후 사의도(蓑衣渡)에서 [[풍운산]]을 잃고, [[창사|장사]] 공략에 실패하고 [[소조귀]]를 잃는 등 고전했지만 기어이 [[무창]]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라이벌인 [[풍운산]]과 [[소조귀]]가 전사하여 양수청의 조직내 입지는 더더욱 올라갔다. 그리고 태평천국군은 양수청의 건의를 따라서 [[난징|남경]]을 향했고 1853년 2월 10에 출발해서 3월 20일에 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남경을 수도로 삼아 천경(天京)이라고 칭했다. 남경까지 점령한 후 양수청의 권력은 정점에 오르는데 태평천국이 간행한 《행군총요》(行軍總要)에 따르면 양수청은 천부로 여겨지고 있었으며 대다수 남경 시민들을 그를 [[성령]]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였다. 또한 천부하범이 처음 일어난 3월 3일은 야강절(爺降節)이라 하여 태평천국이 시행하는 6일의 [[공휴일]] 중 하나였다. 양수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타고난 성격이 드러나며 권위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우선 천부의 입을 빌어서 입법이나 행정 등에서 자신의 의지를 개입시키기 시작했다. 또한 다른 왕들의 반발을 의식했는지 천부하범을 통하여 그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는데 워낙 권위가 세다보니 [[홍수전]], [[석달개]], [[위창휘]]도 양수청의 천부하범 아래에서는 땀을 뻘뻘 흘릴 정도였다. 당시 양수청은 정군사(正軍師)로서 군권을 쥐고 있었기에 실질적 권위도 상당했고, 종교국가인 태평천국에서 천부의 입이라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1853년 말, 홍수전이 [[후궁]]을 가혹히 때리자 양수청이 불만을 품고 홍수전을 매질하겠다고 나설 정도였다. 홍수전은 잘못을 빌었지만 [[태형]] 40대를 맞았다[* 심지어 이것도 수많은 신하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에 벌어진 일이었다(...) 중국 역사상 황제가 신하한테 이렇게까지 모욕을 당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는데, 이토록 오만방자하게 횡포를 부리는 양수청을 홍수전이 미워하여 제거하려 들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일이 반복돼서 [[위창휘]], [[석달개]]가 대신 매를 맞겠다고 나설 정도였으니 그의 위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또한 '권위사(勸慰師), 성신풍(聖神風)'이라 스스로를 칭하고 50인이 메는 가마를 타고 나섰다. 이 가마는 크기가 매우 컸으며, 가마 사이의 벽마다 물을 넣어 무더운 여름에도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여 안에 들어가면 아주 시원했다고 한다. 남경 점령 후 많은 태평천국 간부들이 [[일부다처제]]를 따라 첩을 취했는데 가장 앞장선 것도 양수청이라 전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