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수청 (문단 편집) == 동왕의 활약 == 1853년에 남경을 점령했지만 태평천국이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청나라는 당연히 그들을 소탕하려고 했고 향영(向榮)을 흠차대신으로 삼아 남경 함락 3일만에 성의 지척에 강남대영(江南大營)을 건설했고, [[양저우|양주]]에 강북대영(江北大營)을 설치하여 남경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또한 태평천국군이 버리고 간 [[호북성]], [[호남성]] 일대에 아직 청군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상하이]], [[항저우]], [[쑤저우]] 등의 배후 지방 역시 얻지 못했다. 그리고 [[베이징]]에는 [[함풍제]]가 눈에 불을 켜고 태평천국을 멸하려 궁리를 하는 중이었다. 여기에 대해 양수청은 뜻밖에 군사를 3갈래로 나누어서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우선 1853년 5월, 양수청은 북벌군 20,000여명을 편성하여 출병시켰는데 대장은 [[임봉상]]이었으며 [[이개방]], [[길문원]], [[주석곤]], [[황익운]]을 부장으로 삼아서 북벌을 지시한다. 양수청은 신속히 북상하여 [[베이징]] 근처에 도달한 후 후속 제대와 힘을 합쳐서 [[베이징]]을 함락토록 지시했으나 선전에도 불구하고 1855년 북벌군은 궤멸당했다. 뒤이은 군사 행동은 서정이었는데 1853년 6월 3일을 기일로 하여 출병시켰다. 약 3년간 [[석달개]], [[뇌한영]], [[호이황]], [[위준]], [[증천양]], [[석상정]], [[진일강]], [[진옥성]], [[황옥곤]], [[범여증]], [[이수성(태평천국)|이수성]] 등의 장수가 분전하여 구강(九江), [[안칭|안경]], [[무창]]을 점령하여 영역을 확대하고 식량 수급을 원활히 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늦게 공략한 곳은 바로 앞서 언급된 강남대영과 강북대영이었는데 당시 대다수 군이 북벌, 서정에 나서서 남경내 병사는 성 밖의 강남대영, 강북대영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854년 봄까지는 강남대영의 군사가 북벌군 및 [[진강]]의 태평군 등을 경계하느라 7,000명까지 줄어서 대치상황만 이어졌으나 홍단선(紅單船)이라 불리는 큰 함선 50척이 흠차대신 향영의 손에 들어가자 전국은 급변했다. 홍단선은 1척에 대표 50문의 탑재가 가능하여 그간 밀리던 청나라 수군의 전황을 변화시켰고 수운이 점령당하며 천경의 식량 사정은 급박해져 갔다. 이에 태평천국은 서정에 나섰던 군대를 회군시키는데 1856년 봄을 기일하여 작전을 개시했다. [[오여효]](吳如孝)는 진강에서 출발하여 천경을 향해 서진을 개시했고, [[진일강]]이 이끄는 남경의 태평천국군 본대는 성에서 출병하여 동진을 개시하니 3월 18일에 양군은 회합에 성공했고 4월 2일에는 [[양저우|양주]]를 점령하여 압박의 강도를 낮췄다. 또한 향영이 장국량(張國樑)을 강북대영으로 파견하도록 만들어서 강남대영의 본대는 약해져 가도록 만들었다. 이 때 [[홍수전]], 양수청의 명을 받고 달려온 [[석달개]]는 서정군을 이끌고 [[안휘성]]을 돌아서 회군하고 있었다. 또한 [[진일강]]이 이끄는 군대는 [[진강]]으로 다시 돌아 들어가 강소 순무 길리항아(吉爾杭阿)를 패배시키고 자살케 만들었다. 더 나아가서 6월 13일에 진일강은 남경으로 진격하여 청군 근처에 진을 쳤고 향영은 다시 장국량을 본영으로 불렀다. 그런데 어이 없게도 석달개가 진군해오자 향영은 태평천국군의 의도대로 장국량이 이끄는 정예를 밖으로 보냈는데 이로인해서 강남대영 본영은 크게 취약해졌다. 양수청을 이 때가 적기라 판단하여 성의 동북면에 모인 군대에게 총공격을 지시하니 6월 17일에 태평천국군은 진공을 개시한다. 6월 18일에 [[진일강]]은 부장인 [[이수성(태평천국)|이수성]], [[진옥성]]과 군대를 삼분하여 명효릉(明孝陵)[* [[주원장]]의 [[황후]]인 마황후의 무덤]에 있는 강남대영 북편을 집중 공격했고, 19일에 청군은 물러나기 시작하여 20일에는 총공격을 받았다. 이 때 남경의 수비대도 출병하여 강남대영의 서쪽을 치니 장국량도 싸우다 큰 부상을 입고 향영은 철수를 결정한다. 항영은 단양(丹楊)으로 진을 물리고 남경의 숨통은 트이게 됐으며 양수청의 권위는 절정에 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