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수청 (문단 편집) == 형제의 손에 죽다 == 양수청의 활약은 굉장했고 태평천국의 안정을 불러왔다. 하지만 양수청의 교만과 욕심이라는 불꽃에 기름을 부은 격이 돼서 더욱 방자한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양수청은 구천세(九千歲)를 받는 자신의 입지를 더욱 높이고자 했다. [[홍수전]]만이 천왕으로서 만세(萬歲)를 받을 수 있었는데 자신도 만세를 받고자 했다. 이것을 위해서 천부하범을 사용해서 홍수전을 압박했는데 홍수전은 일시적으로 굴복하여 양수청과 그의 아들이 만세를 받게 하겠다고 했다. 이 때가 양수청의 생일 약 2달전이었다. 물론 홍수전 입장에서야 속이 뻔히 보이는 짓거리가 싫었고 그간 당해온 것에 대해 압력과 위협을 느껴서 양수청의 [[숙청]]할 필요를 느꼈으나 당장은 할 수가 없었다. 양수청은 정치적 감각이 좋았는데 이런 협박을 위해서 [[석달개]]를 [[호북성]], [[진일강]]은 단양, 위창휘는 서정군을 지휘토록 해서 [[난창시|남창]]으로 보내버려 홍수전은 당장 힘이 없었다. 또한 진성용(陳成瑢)[* 진승용(陳承瑢)이라고도 불리며 [[진옥성]]의 숙부] 및 [[석달개]]의 장인 [[황옥곤]]과 홍수전을 오래 섬긴 [[진일강]], 북왕 [[위창휘]]에게도 사적인 태형을 내리는 등 위세를 과시했다. 또한 가족이 있었지만 사명(賜名)[* 이름을 하사하는 것], 사성(賜姓)[* 성을 내림]을 통해서 세력을 확대했는데 이런 식으로 약 10여 명이 양씨 성을 얻거나 양수청의 이름 일부를 받고 그의 형제가 됐다. 대표적인 예시가 양수청의 의동생인 보왕(輔王) [[양보청]]이다.[* 양보청의 원래 이름은 양금생(楊金生)인데 성은 원래 양씨지만 양수청과 실제 형제 관계는 아니었다. 양수청의 이름 중 淸자를 받았다.] 이러한 형편이니 양수청에게 대들기는 쉽지 않았다. 당연히 홍수전도 바보는 아닌 이상 양수청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시작은 양수청의 실언이었다. [[1차 강남대영 격파]] 후 양수청은 홍수전의 의견대로 방어만 했으면 어떻게 됐겠냐면서 면박을 줬는데 이 말을 홍수전의 [[처남]]인 [[뇌한영]]이 들은 후 당할 수만 없다면서 양수청 제거를 권했다. 뇌한영은 궁중 내에서는 양수청의 눈을 피해서 일을 꾀할 수 없으니 외부의 장수를 불러들이라고 권했다. 또한 [[진옥성]]의 [[숙부]]인 진성용(陳成瑢)이 양수청을 [[역적]]이라 참소하자 이를 계기로 [[석달개]], [[위창휘]], [[진일강]]에게 밀명을 내려서 양수청을 제거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그를 가까이서 본 아일랜드 출신 용병에 따르면 양수청은 개인적인 첩보망 혹은 타고난 직감을 통해 고민과 절망을 상당히 드러냈다고 한다. [[진일강]]은 정예를 이끌고 미리 남경에 들어왔으며 1856년 9월 1일 밤에 [[위창휘]] 역시 3,000명을 이끌고 돌아와 9월 2일 새벽에 양수청이 머무는 동왕부를 공격했다.[* 당시 태평천국의 왕들은 각자의 부를 설치했는데 홍수전, 석달개, 위창휘, 양수청의 부는 남경성에 있었다.] 석달개를 기다리다가 반격 당할 위험을 제거키 위함이었다. 9월 2일의 학살을 통해서 동왕부의 인원들은 전멸당했다. 양수청 역시 비밀통로를 통해 탈출하려 했으나 발각당해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때 잘려나간 양수청의 목은 그가 평소에 물고기들을 넣어서 키우던 대형 수족관 안에 던져졌다.]. 태평천국이 중국 역사상 최초로 여자를 대상으로 치른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한 부선상(傅善祥)은 양수청의 비서였는데 이 때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 석달개는 9월 26일에 남경으로 귀환했지만 그 사이에 [[홍수전]]은 옛 형제인 양수청에게 손속을 두지 않았으니 양수청을 따르는 세력 6,000여명을 학살했다. 9월 3일, 홍수전은 소동을 일으킨 [[진일강]], [[위창휘]]를 [[공개처형]]하겠다고 공표하여 양수청의 세력을 한데 모은 후 군사를 시켜서 살육을 저질렀다. 짐승몰이를 하듯이 죽였다고 하는데 화약까지 사용할 정도였다. 죽은 대다수는 [[태평천국의 난]] 초기부터 따른 [[광서성]] 출신의 신자들이었다. 이에 반발한 석달개는 귀환한 9월 26일 밤에 바로 남경을 빠져나간 후 군사 10만을 모아서 약 3개월 후 [[위창휘]], [[진일강]]의 처벌을 요구하며 오는데 그 3개월간 홍수전, 위창휘, 진일강은 신고를 장려하며 의심스러운 자를 죽이니 남녀노소를 포함하여 약 40,000명이 죽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천경사변'''(天京事變)이라 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홍수전은 양수청이 [[승천]]했다면서 9월 2일을 동왕승천절이라 정했다. 대부분 양수청의 세력은 죽었지만 보왕(輔王) [[양보청]]은 남경 밖에 있어서 변을 피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