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수청 (문단 편집) == 기타 == * 양수청이 실제로 [[홍수전]]을 끌어내리려 했는지는 명확치 않지만 가능성은 적은 편이었다. 우선 홍수전은 천부의 대리인이자 [[성령]]노릇을 하는 양수청의 위세하에 [[허수아비]] 노릇이었지만 종교의 [[교주]]라는 입장상 양수청이 그를 쉽게 제거하기는 쉽지 않았고 얻을 것이 크지 않았다. 또한 양수청은 후반기에는 군권을 모두 장악한 상태였는데 진심으로 홍수전을 죽일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할 수 있었다. 당시 홍수전은 궁궐에 틀어박힌 신세라 그가 양수청을 제거하기는 쉽지 않았다. * 행적에서 연상되는 외모는 [[이아고]]나 음흉한 정치꾼이지만 실제로 본 신원미상의 용병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상당히 귀티나고 호감형의 외모였다고 한다. [[애꾸]]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의외의 외모. 평소에 늘 과격한 것은 아니고 말투 역시 온화한 축에 들었다고 한다. * 또한 음모만 꾸밀 것 같은 느낌과는 다르게 상당한 [[워커홀릭]]이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했고 태평천국의 법도에 따라 왕이지만 직접 [[교리]] 전파나 [[설교]] 하러 밖에도 나갔다고 한다. * 위에 언급된 아일랜드 용병[* 신원은 미상이며 [[진일강]] 밑에서 일하다가 신뢰를 얻어서 남경에 들어왔고 양수청의 호감을 사서 그가 죽기 전에 관찰한 기록을 남겼다. 천경사변 때 살아남아 1856년 12월 10일 [[상하이]]로 도망쳤다.]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고 외국인이라도 차별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양수청은 [[유교]]의 교리도 흡수하고 중국의 현실에 맞게 사상을 개창하는 성향이 있어서 꽉막힌 인물은 아니었다. 단지, 정치나 행정 관련 센스에 비해서 욕심이나 인성이 따라와 주지 못했다. * [[문맹]]이라 알려져 있다. * 상당한 [[호색한]]이었는데 첩실이 약 열댓 명 정도였다. 양수청의 주치의는 [[과로]]로 인해 나빠지는 양수청의 눈 외에도 자양강장제 등 [[정력]]에 좋은 약도 챙겨야 했다. * 1961년 1월 11일, [[태평천국 운동]] 110주년을 기념하는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이 개관했는데 위치는 [[난징]]의 첨원(瞻园)이라는 정원이었다. 이곳은 원래 양수청의 개인 궁궐인 동왕부(東王府)였고 그가 죽은 후 [[소조귀]]의 아들이자 유서왕(幼西王) 소유화(蕭有和)에 의해서 유서왕부(幼西王府)로도 쓰였다. 이곳은 남경에 현존하는 유일한 [[명나라]], [[청나라]] 대의 정원인데 금릉제일원(金陵第一園)이라고 불리며 한 때는 [[서달]] 관저의 일부였으며 청나라 때는 포정사의 관청이었다. [[건륭제]]도 남방 순행 중 들르기도 했으며 국가 핵심 문물 보호지역 및 5A급 관광 특구인데 태평천국과 관련된 전시 기관 중 가장 풍성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