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용 (문단 편집) == 생애 == [[북주]] 때에 조부 [[양충]]의 공으로 박평후에 봉해졌다. 이후 580년에 아버지 [[양견]]이 [[승상]] 겸 수왕(隋王)에 봉해지자 수왕세자(隋王世子)에 책봉되었고, 그 이듬해인 581년에 아버지가 [[황제]]가 되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문제(수)|수문제]]는 양용에게 군국에 관한 정사에 참여하는 것을 명하면서 이에 대한 결정권을 주었다. 양용 본인의 성격은 관대하고 후덕했지만 생각과 감정에 짧았으며 교만하면서 꾸미는 행동이 없었다. 양용은 [[호색한|속으로 총애하는 여인이 많았고]] 591년에 소훈 운씨를 총애했다가 그의 태자비 원씨가 이로 인해 마음의 병을 얻어 이틀 만에 사망하자 [[문헌황후]]에게 책망받았으며, 수문제 본인이 절약과 검소함을 실천했기에 양용이 가지고 있던 촉 사람이 만든 방패를 그가 문장으로 꾸미자 수문제가 이를 좋아하지 않고 훈계했다. 동지 때 문무백관이 양용에게 오자 음악을 베풀고 축하를 받았는데, 수문제가 이를 알고 동지에 조회에서 하례하고 토산물로 공물을 만들어 따로 동궁에 올리는 것을 정지시켰다. [[양제(수)|양광]]이 [[궁녀]]를 양용의 집에 보내 술을 마시게 하는 등 계획적으로 사치스럽다는 이미지를 뒤집어씌우면서 독고황후가 양용이 태자로 있기에는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 판단해 양광, 독고황후는 양용을 태자 자리에서 폐위하려는 모의를 한다. 양용은 이 일을 알고 걱정하고 두려워했지만 계책이 없어 왕보현에게 여러 가지 저주하는 물건을 만들어 좋은 운수가 돌아오도록 하는 비방을 했으며, 후원에 낮고 누추한 서인촌을 만들어 그 안에서 자고 쉬면서 베옷을 입고 풀로 만든 자리를 깔면서 이 문제를 감당해내길 바랐다. 이 일로 인해 수문제가 양용이 불안해하는 것을 알고 [[양소(수나라)|양소]]를 보내 살피도록 했는데, 양소가 동궁에 도착해서는 누워서 쉬면서 들어가지 않았다. 양용은 허리띠를 묶고 그를 기다렸지만 양소는 고의로 오랫동안 나아가지 않아 양용이 노하면서 이를 악물고 말과 얼굴빛에 드러냈으며, 이로 인해 수문제는 양소가 험담하는 소리를 듣고 양용을 의심했다. 문헌황후가 사람을 보내 [[동궁]]을 엿보고 미세한 일도 모두 상주해 알리도록 했으며, 속이고 꾸며서 그의 죄를 만들자 수문제는 양용을 멀리고 정탐꾼을 가득 두어 동정을 살피게 했다. 600년에 이부시랑 소좌보, 태자가령 주문동 등과 연무장에 나눈 얘기들이 양광 일파에 의해 역모로 변질되었고, 결국 600년 12월에 양용은 황태자에서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이 때 상서좌복야 [[고경]]이 양견을 말렸으나 문헌황후의 설득으로 결국 승인되었다. 결국 양용은 정신 이상을 명분으로 태자에서 폐위되어 방릉왕(房陵王)으로 강등된 후 내사성으로 옮겨 5품 관직에 해당하는 양식을 받았으며, 604년에 양광의 사악함이 밝혀져서 아버지 수문제에 의해 다시 태자로 복권될 수 있었으나 이를 눈치챈 양광의 의해 아버지 수문제가 죽고 수양제가 즉위하면서 수양제의 부하인 우문지급에 의해 피살당했다.[* 웃긴 건 그를 죽이라고 사주한 동생 수양제 역시 결국 같은 우문지급에게 피살당한다.] 양용의 자식으로는 아들이 10명, 딸이 1명 있었다고 한다. 정비는 2일 만에 사망했으니 전원 측실 소생일듯. 그러나 양용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니 그의 자식들도 죽임당했을 가능성이 높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