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원 (문단 편집) == 최후 == [[남원 전투]]에 3천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여기서 양원은 남원성의 조선군, 주민들이랑 합심하여 일본군에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으나 결국엔 패하고, 남원성이 함락될 때 기병 50명을 데리고 성을 탈출한다. 허나 이 때문에 명군에 붙잡혀 경리 [[양호(명나라)|양호]]에 의해 패전의 죄를 물어 군법에 따라 [[처형]]된다. 그래도 조선인들에게 밉보이진 않았는지, 이때 조선에선 양원 구명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명나라의 사령관 양호는 단호히 선처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고 한다. ||양 경리(楊經理)가 호조판서 김수(金睟)를 불러 말하였다. "당신 나라에서 양원(楊元)을 구제한다고 하던데, 군문(軍門)의 제본(題本)에 죄주기를 청하였고 나도 역시 죄주기를 청하였으며 급사중(給事中)도 역시 죄주기를 청하였다. 당신 나라에서 만약 구제한다면 말이 서로 어긋날 뿐만 아니라, 제장(諸將)들이 현재 병사를 철수하고자 하는 때에 이들이 필시 양원의 행위를 본받을 터인데, 어떻게 할 작정인가?"|| 처형된 양원은 사후 목이 한성의 남대문에 효수된다. 나중에 조선에서 양원의 초상을 평양성의 무열묘에 봉안하여 제사 지내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