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원석 (문단 편집) == 생애 == 일제강점기 그와 가족은 함께 일본에서 살았는데 2차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자 가족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혼자만 일본에 남았다. 왜 남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좀 갈리는데 해방후 시모노세키에서 한국으로 출항하는 연락선을 타려던 중 일본 불량배들과 싸움에 휘말려 배를 놓치고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이지만, 단순히 돈벌려고 남았다.. 는 말도 있다. 혼자 일본에 남은 뒤로는 폭력배로서 자신의 오른팔인 타니가와 코타로(강동화)와 함께 야나가와구미를 크게 키워냈다.오사카에서 제법 세력을 떨치다가 고베의 고위 폭력단 [[야마구치구미]]의 산하로 들어가 야마구치구미가 전국구로 세력을 떨치는데 앞장 섰다. 특히 이사람이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이 기토오 구미와의 100대8 싸움. 8명밖에 안되는 소수의 조직원으로 100명 가까이 되는 기토오 구미의 본거지로 처들어가서 이겨버린 이 사건은 당대의 화제가 되었고, 덕분에 그를 모델로 하는 소설, 만화 등이 많이 나왔다. 다만 그 과정에서 미화도 많이 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굉장히 흉악하고 잔인한 야쿠자였기 때문에 걸러서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그가 재일교포였기 때문에 더더욱 미화되어서 받아들여지곤 했는데, 야나가와구미의 보스로 이권이나 이익을 위해서는 같은 재일동포도 참살해버렸다는 것을 감안하자. 1968년 아이치현 민단에서 폭력단을 축출하기로 하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8111400329203017&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8-11-14&officeId=00032&pageNo=3&printNo=7110&publishType=00020|민단 지부장 김용환이 (양원석의 야나가와구미 부하인) 최재수에게 피살]]되었다.[* 이 김용환의 동상은 [[국립극장]] 근처에 있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남산공원에 있다. 독립운동가 [[김용환]] 항목 참조. 동상이 있는 건 그가 민단 지도자이자 반공 투사로 유명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976년에는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120300209208009&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12-03&officeId=00020&pageNo=8&printNo=16976&publishType=00020|스모선수 타카노하나의 한국 방문을 주선]]했다. ~~타카노하나는 [[미야자와 리에]]와도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이 타카노하나는 앞에 나온 타카노하나의 아들. 아버지 타카노하나는 50년생이고 아들 타카노하나는 72년생이다.] 일본 최대의 폭력단 야마구치 구미의 전투군단이 그의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5012800209204015&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01-28&officeId=00020&pageNo=4&printNo=19483&publishType=00020|야나가와구미]]였다. 당시 칼럼에 의하면 키토우구미와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5120400209205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12-04&officeId=00020&pageNo=5&printNo=19747&publishType=00020|이권다툼]]을 했고, 메이유카이를 쳐부수는데 앞장섰으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5120500209209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12-05&officeId=00020&pageNo=9&printNo=19748&publishType=00020|관서가 주무대]]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조직폭력단 해체작전인 정상작전의 결과 조직을 해산했는데 야마구치구미로부터 본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멋대로 해산하였다 하여 [[파문]]되었다. 다만 부하들이 모두 야마구치구미의 직계로 들어가 활약한 걸로 보면 어느 정도 야나가와구미를 희생양으로 해서 겉으로만 해산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게 중론이다. 1988년에는 미야기현 [[민단]]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60900209211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6-09&officeId=00020&pageNo=11&printNo=20517&publishType=00020|지부장]]이 되었다. 이후 사망할 때까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일했고 전두환 정권 시절 한국 정부로부터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았다. 참고로 해체를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감옥에서 복역 당시에 자신의 딸과 동갑인 15세의 한 재일교포 여학생에게서 받은 "야나가와씨, 재일 동포들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말아주세요"라는 편지를 읽고나서 해체를 결정했다고 한다. 이때 2대 회장이 된 강동화(일본명 타니가와 코타로)가 처음엔 반발했지만 ‘오야붕이 만든 조직이니 맘대로 해..’하며 울면서 승복했다고.....[[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5120400209205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12-04&officeId=00020&pageNo=5&printNo=19747&publishType=00020|#]] 한국 [[중앙정보부]] 및 [[보안사]]와 연줄이 있었다. 80년대에는 보안사 일본지부장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우익 야쿠자로 활약하면서 조총련 및 북한과 연계하는 좌익들을 견제하는데 힘을 보탰다. [[http://www.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87297|권정달 회고록 중 내용]]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