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정고등학교(서울) (문단 편집) == 학교 역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춘정 엄주익.jpg|width=100%]]}}}|| || {{{#fff '''설립자 춘정(春庭) 엄주익'''}}}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90827154930900_FCA2NRFO.jpg|width=100%]]}}}|| || {{{#fff '''양정고등학교 창학이념'''}}} || [[1905년]] 2월 11일 춘정(春庭) 엄주익[*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관료. 최종 계급은 육군 [[소장(계급)|참장]]이다. [[한성부판윤]], [[군부(대한제국)|군부]]협판, [[법부]]협판을 역임하였다.][* 협판(協辦)은 오늘날의 [[차관]]에 해당하는 직위이다.]이 양정의숙을 설립하고 초대 숙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군부협판으로 재직하던 시기 근대적인 군사제도를 시찰하기 위해 [[일본 제국|일본]]에 다녀왔는데, 이때 근대교육의 보급이 국가 발전의 핵심임을 깨달았다고 한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6228#|#]] 이는 양정의숙 창학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숙사를 서부 적선방 도렴동에 증축하고, 4월에 학부로부터 본숙의 정식 설립 인가를 받아 개교하였다. 춘정 엄주익은 [[순헌황귀비 엄씨]]의 7촌 조카로, 순헌황귀비와 그녀의 친정 엄씨 가문은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아 이듬해인 [[1906년]] [[진명여자고등학교|진명여학교]]와 [[숙명여자고등학교|숙명여학교]]도 설립했다. '養正'이란 교명은 [[주역]]에 나와 있는 '''蒙以養正, 養心正己'''에서 따온 것. 어떤 연유로 '''몽이양정 양심정기(蒙以養正 養心正己)'''를 건학이념으로 내세웠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양정''''으로 채택했는지는 아직까지 불명이다. 이에 대해 조선 말기의 학자 '윤경규'가 왕세자 교육에 관련된 내용을 모은 양정록(養正錄)에서 유래를 찾는 견해도 있다. 현재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5월 12일]]이란 날짜는 [[2004년]], 교사 2명이 [[1905년]] 5월 15일 [[황성신문]]에 나와있던 입학일자를 찾아 변경되었다.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자진 격하 이후 [[10월 1일]]이란 개교기념일을 사용한 지 91년 만이었다. {{{#!folding [ 학교 약력 - 펼치기 · 접기 ] ||[[1905년]] ||춘정 엄주익이 서울 [[종로구]] 도렴동에 [[양정의숙]]이라는 이름으로 법학과 창학[* 실제로 창학 터 기념비가 [[세종문화회관]] 뒷길에 남아있다.]|| || [[1907년]] ||[[순헌황귀비]]가 양정의숙에 약 200만평을 하사함 || || [[1908년]] ||경제학 전문과 설치. 4월 15일 양정의숙 1회 졸업 (26명)[* 1909년 4월 24일 2회 19명 졸업, 1910년 3월 3회 법학과 31명, 경제과 27명 졸업, 1911년 7월 9일 4회 28명 졸업, 1912년 7월 6일 5회 졸업하였으나 졸업생수와 명단이 확인되지 않음.] || || [[1913년]] ||[[조선교육령]]에 의해 폐지 후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인가.[* 2017년 기준 창학 112주년인데도 2017년 졸업생이 100기 졸업생인 이유가 이 조선교육령 때문이다.]|| || [[1915년]] ||양정창립 10주년 기념식|| || [[1918년]] ||서울 [[중구(서울)|중구]] 만리동으로 교사이전|| || [[1922년]] ||[[조선교육령]] 개정에 의해 5년제로 변경|| || [[1924년]] ||교지 '養正' 창간|| || [[1925년]] ||양정창립 20주년 기념식|| || [[1931년]] ||초대 교장 엄주익 선생 사망, 학교장으로 장례식 거행. 제 2대 교장 안종원 선생 취임|| || [[1935년]] ||양정창립 30주년 기념식|| || [[1936년]] ||양정고보에 재학중이던 손기정, 남승룡이 [[1936 베를린 올림픽|베를린 올림픽]]에서 각각 마라톤 금, 동메달을 차지|| || [[1938년]] ||[[조선교육령]]에 의하여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양정중학교로 학칙개정|| || [[1941년]] ||제 3대 교장 서봉훈 선생 취임|| || [[1945년]] ||양정창립 40주년 기념식|| || [[1946년]] ||제 1회 [[양배전]] 개최|| || [[1947년]] ||제 4대 교장 엄경섭 선생 취임|| || [[1948년]] ||양정타임스 (현 YangChung Times 영자신문) 창간|| || [[1949년]] ||학도호국단 발족|| || [[1950년]] ||중학교 4년제로 변경.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임시 휴교 후 서울 수복과 동시에 개교|| || [[1951년]] ||대구와 부산에 임시 개교하였고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으로 분리 개편|| || [[1952년]] ||양정염전[* 선배들의 기금을 제외한 돈을 대부분 이곳에서 마련한다. 양정 재단의 전신으로서 현재까지도 본 학교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개발공사 착수|| || [[1953년]] ||대구, 부산의 임시학교 서울로 복귀|| || [[1955년]] ||양정창립 50주년 기념식|| || [[1960년]] ||양정고등학교 학우회'를 창설하여 [[4.19 혁명]]에 참여|| || [[1965년]] ||양정창립 60주년 기념식|| || [[1973년]] ||당시 교장 엄경섭 선생이 국회의원으로 선임되며 제 5대 교장(현 이사장) 엄규백 선생 취임|| || [[1975년]] ||양정창립 70주년 기념식|| || [[1983년]] ||대만 타이베이시 '항의고급중학교'와 자매결연, 양정이 자랑하는 국제교류의 시작이다|| || [[1985년]] ||양정창립 80주년 기념식|| || [[1988년]] ||교사를 현재의 위치인 서울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 기존의 만리동 교사는 [[손기정]] 체육공원으로 조성|| || [[1995년]] ||양정창립 90주년 기념식|| || [[2001년]] ||제 8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양정고 럭비팀 2회 연속 우승|| || [[2002년]] ||신관 증축|| || [[2005년]] ||100주년 기념관 준공식 및 양정창학 100주년 기념행사|| || [[2006년]] ||뉴욕주립대학교 제네시오 대학과 협력학교 약정|| || [[2008년]] ||제 6대 교장 김창동 선생 취임|| || [[2011년]]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 || [[2014년]] ||제 95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양정고 럭비팀 우승, 양정고 산악부 동아리 우승|| || [[2014년]] ||제 95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양정고 럭비팀 우승, 양정고 산악부 동아리 우승|| || [[2015년]] ||제 7대 교장 김정수 선생 취임, 양정창립 110주년 기념식, 음악회|| || [[2017년]] ||100회 졸업식|| || [[2021년]] ||제 9대 교장 이범희 선생 취임|| }}} 학교의 [[역사]]가 긴 만큼 이런저런 야사들이 많다. [[태평양 전쟁]] 시기 설립자 동상과 럭비부 우승 트로피 등 교내의 모든 쇠붙이가 공출당하기도 했고[* 현재 1층 중앙현관에 학교 운동부 및 동아리가 수상한 트로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유리 전시장 가운데 위쪽을 자세히 보면 오래된 흑백 사진이 하나 있다. 이게 바로 공출당하기 전 일제시대에 수상했던 트로피들을 찍어놓았던 사진이다.], 학생들도 강제 징용되어 당시 [[경성부]] 내 건설 현장에 동원되기도 했다. 또 [[6.25 전쟁]]을 거치며 당시 [[물리]] 교사 한 명이 제자에게 총살당한 아픈 역사도 가지고 있고[* 당시 담임을 하던 학생 한 명이 좌익 운동을 하다가 수감되자 그의 동료들이 감옥에서 빼내달라고 부탁했으나 이를 거절했고, 결국 그 학생은 옥사하였다. 이후 전쟁이 터지자 보복으로 친구들이 교사를 산으로 끌고 가서 총살했다고 한다.], 전쟁을 거치며 학교 본관의 거의 모든 기물이 털리다시피 하기도 했다.[* 책상과 의자는 물론이고, 각종 교무행정 자료들과 [[피아노]]까지 싹 다 없어졌다. 심지어 [[일제강점기]] 비행사였던 서웅성 동문이 기증한 비행기까지 털렸다고.] 다행히 당시 학교 경비원이 학적부를 전부 '''땅 속 항아리'''에 묻어서 동문 자료만은 보존될 수 있었다. [[1983년]]에는 학생들이 [[야자]]를 하다 추워서 피운 불이 건물에 옮겨붙어 '''본관이 전소되는 일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