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정모 (문단 편집) == 일생 == 1921년 9월 13일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부]]에서 양태진(梁泰振)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산공업고등학교|부산공립공업학교]] 졸업 후, 1949년 부친과 함께 부산에 국제고무공업사를 설립해 '''왕자표''' [[고무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6.25 전쟁]] 와중에 군수품 생산으로 큰 돈을 모았다. 1963년 신발류와 비닐제품 생산업체 진양화학[* 1974년에 동생 양규모에 의해 독립하여 현재의 KPX그룹이 되었다.]을 세워 1970년대초 신발 수출 붐을 타고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이후 직물가공업체 성창섬유, 국제상선, 신동제지, 동해투자금융 등을 잇따라 창업하고 동서증권, 동우산업, 조광무역, 국제토건, 국제종합엔지니어링, 원풍산업, 연합철강[* 그러나 인수 과정에서 창업주인 권철현(1925~2003)과 연관된 논란이 많았다.] 등을 인수하며 [[재벌]] 반열에 올랐다. 1980년대 초반 들어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서열 7위 기업집단으로 키웠다. 1976~1985년까지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및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지내며 부산도시가스 및 항도투자금융 설립에 참여했고, 1981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지냈다. 그러나 1985년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국제그룹]]이 해체된다. [[국제그룹 해체 사건]] 문서 참조. 결국 주력 계열사였던 국제종합건설과 동서증권은 극동건설그룹에, 연합철강과 국제종합기계는 동국제강에, 국제상사 등 나머지 계열사와 국제그룹 사옥은 한일그룹에 각각 넘어갔다. 당시 정부 측은 그룹 해체 원인이 자체 브랜드 개발 실패 및 용산사옥 신축으로 인한 자금난, 전근대적 경영방식, 사우디 건설업 적자 등으로 보았으나, 세간에선 양 전 회장이 정치자금 헌납 등의 요구를 거부하고 대통령이 주재하는 모임에 늦게 나타난 것이 최고 권력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이것이 그룹 해체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게 재계의 정설이다. 이후 1987년에 '[[국제그룹]] 복원 추진위원회'를 세워 1988년부터 정부를 상대로 [[국제그룹]]의 해체가 부당하다며 위헌 소송[* 당시 소송 대리인이 [[조영래]], [[황인철]] [[변호사]]였다.]을 벌여 1993년에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정을 받아 1994년에 한일합섬을 상대로 국제상사를 돌려받고자 '주식인도 청구반환 소송'을 냈으나 1996년에 대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고, [[1997년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결국 그룹 재건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국제 계열사들을 많이 가져간 [[한일그룹]], [[극동그룹]] 등이 외환위기로 파산했기 때문이다. 결국 1998년 [[부산도시가스]] 사외이사 추대 후 고향인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칩거생활을 하다가 2009년 3월 29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에서 [[노환]]에 따른 [[폐렴]]으로 [[https://www.joongang.co.kr/article/3549875#home|세상을 등지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