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정장 (문단 편집) === 후주 시기 === 951년 곽위가 즉위하여 [[후주]]를 건국한 뒤, 양정장의 누이를 숙비(淑妃)로 추봉하고 양정장을 우비룡사(右飛龍使)로 발탁하려고 했다. 양정장은 우비룡사를 고사하며 받지 않았고 대신 곽위에게 아버지 양홍유(楊洪裕)에게 은상을 내릴 것을 주청하였다. 곽위는 양홍유를 불러 부궐하게 했지만 양홍유가 노병으로 인해 사양하여 대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진정부소윤으로 임명하였다. 양정장은 황성사(皇城使)·소의군(昭義軍) 병마도감(兵馬都監)·전주순검사(澶州巡檢使)를 역임하였다. 당시 전주자사는 곽위의 양자인 시영이었는데, 양정장을 외숙부로 불렀다. 시영이 전연(澶淵)에서 수도로 돌아올 때 곽위에게 양정장이 재간이 있다고 칭찬하여 양정장은 객성사(客省使)로 승진하였고 하양(河陽)으로 부임했다. 당시 사의(史懿)가 병을 핑계로 입조하지 않자, 곽위는 양정장에게 사의를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양정장이 장차 출발하려고 할 때 곽위는 양정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의가 조명을 받지 않는다면 곧바로 양정장을 도모하시오. 양정장은 경주(涇州)로 도착하여 주위 사람들을 물린 뒤 사의에게 곽위의 조서를 보여주니 사의는 바로 그날 조정으로 향했다. 뒤에 곽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양정장은 피를 토하고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곽위의 양자인 시영이 즉위한 뒤 양정장은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으로 임명되고 선휘북원사(宣徽北院使)를 맡았다. 시영이 [[유민(북한)|유민]]을 정벌할 때 건웅군절도사(建雄軍節度使)로 임명되었다. 양정장은 여러 해 동안 절도사를 맡으면서 군민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었다. 또한 여러 차례 군대를 이끌고 태원(太原) 경계로 입성하여 인의채(仁義砦)·고벽채(高壁砦) 등을 함락시키고 자사와 군교 수십 명을 사로잡았으며, 태원의 백성 수천 호를 사로잡고 병기와 양, 말 수만을 노획하였다. 북한이 심주(沁州) 이남 200리를 포기하고 신성(新城)으로 물러나자, 양정장은 보안채(保安砦)·흥동채(興同砦)·백벽채(白壁砦) 등 10여 개의 성채를 축조하였다. 때마침 습주(隰州) 자사 손의(孫議)가 죽자, 양정장은 감군(監軍) 이겸부(李謙溥)에게 습주자사를 대리하도록 명했다. 이겸부가 습주로 부임한 뒤 북한이 습주를 공격하자, 양정장의 수하 장수들은 마땅히 재빠르게 이겸부를 구원해야 한다고 건의했는데, 양정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습주는 성벽이 견고하오. 북한은 갑자기 도착했기 때문에 공성무기를 준비하지 못했을 테니 마땅히 기병을 내어 물리쳐야 하오. 그리고 1백여 명의 군사들을 모아 그들에게 큰 포상을 내리겠다고 약속했고 지름길을 따라 사람을 보내 이겸부에게 내응하기로 약속하였다. 양정장은 곧바로 소리를 내지 않으며 밤에 습격했고 이겸부의 군사들이 양정장에게 내응하여 출병하니 북한의 군대는 크게 무너졌고 북쪽으로 수십 리를 추격하여 1천여 급을 참수하고 수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승전보가 도착하자 시영은 기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며 양정장을 칭찬하였다. >나의 외숙부는 진실로 능히 도적을 막을 수 있소. 시영이 북한을 정벌하고 돌아온 뒤 양정장은 검교태보(檢校太保)가 더해졌다. 959년, 양정장은 휘하 부대를 이끌고 다시 북한으로 입성하여 13개의 성채를 함락시키고 순검사(巡檢使) 근한조(靳漢晁) 등 3명을 항복시켰다. 같은 해 시영이 붕어하고 [[시종훈]]이 즉위하자, 검교태부(檢校太傅)가 더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