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태봉 (문단 편집) == 여담 == * [[제1포병여단]]장 재임 시 예하부대 점검 간 지휘통제실에서 장병들에게 일일이 사랑합니다~ 라고 인사했다고 한다. [[김승겸|사실 6사단 27대대장시절, 6사단 포병연대장 시절 때만 하더라도 상당히 엄격하였는데, 많이 유해지신듯 하다.]] 특히 대대장 시절때는 전 대대장병이 '제식기계'가 될 정도로 군기강이 매우 강했다고 한다. 그리고 포병임에도 능력을 인정받아서 대대장 이임 후 --보병들이 대부분 앉는-- 6사단 [[작전참모]]직으로 영전하였다. *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알려져 있고, 대대장 및 연대장 시절에 매일같이 새벽에 교회에 나와 기도하였다. 그래서 1호차 운전병도 개신교 신자로 뽑았다. * [[김병주]] 장군(육사 40기, 대장 예편)을 두번 직속상관으로 모셨는데, 6사단 27포병대대장 시절 당시 포병연대장이 김병주 장군이었으며, 주단위로 27포병대대의 주요 활동사항을 본인이 직접 편집 및 작성하여 보고하였고 부대원의 안전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등 업무능력에 있어서 이견이 없었으며 당시 김병주 장군이 대단히 칭찬했다고 한다. 간부들에게는 높은 수준의 업무처리 능력을 요구하였으나 병사들에게는 유했으며[* 그러나 간부들의 스트레스가 병사에게 [[내리갈굼]]으로 변질되면서 조삼모사라고 하겠다.] 군인으로서는 대단히 FM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미사일사령부 작전처장(대령) 시절에도 사령관이었던 김병주 장군이 끌어갔었다고 한다. --포병 4성장군이 데려갈 정도의 능력자-- * 예하부대장들과 단순한 VTC 간 회의간 갑자기 '당신은 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토론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보통 그냥 전파하고 알아들었는지 O, X여부만 하는 게 일반적이다.] 여담으로 지목을 당한 모 부대장은 당황하지 않고 답변을 잘하여 잘 넘어갔다는 일화가 있다. 뭔가 있으면 넘어가지 않고 어떻게든 언급하는 스타일이다. 즉 대충 넘어가는 걸 싫어한다. * 훈련에 있어서도 대충 넘어가는걸 싫어하지만, 안전과 직결된 문제에 있어서는 절대 가만두지 않았다. 훈련기동 간 사고를 방지하고자 모 대대는 여단 통제로 진지변환을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훈련은 주둔지에서 실시하고 주둔지 숙영도 조금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경우 장병들의 건강을 염려해 숙영이 취소되고 막사취침으로 '여단'에서 통제를 내렸다. 대신 대규모 훈련이나 평가가 있는 훈련의 경우에는 절대 대충하지 않고, 일반적인 대대급 훈련에서만 편의를 많이 봐줬다.(이점은 호불호가 갈리는데 애초에 훈련 지휘는 군단 지침 우선이라 당시 선진 병영을 외치는 [[안영호]] 중장(육사 42기, 2020년 12월 예편)의 지휘 의도가 우선인 듯하며 안전은 좋으나 예를 들자면 혹한기 훈련을 춥다고 야외 숙영을 시키지 않았으나 주둔지에서 강북 훈련장 등으로 오전 4시 기상 후 기동을 7일간 해야 했다. 훈련이 알다시피 물자 적재, 통신장비 등 무게가 엄청난데 이걸 매일 나가야 하니 오히려 숙영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간부들 및 병사들은 불평을 내비쳤다.) * 모든 대대를 일일이 순회하며 각 대대마다의 작전계획을 청취하고 조언(이라 쓰고 깐다고 읽는다)을 해주었다. 대대장 입장에서 열심히 작전계획을 준비했는데 거기서 까이면 당황잼. 상반기 1번, 하반기 1번씩 꼭 모든 대대를 순회하였다. 여단뿐만 아니라 대대까지 적극적으로 신경쓴다는 것은 사단의 모든 부대들의 유기적인 결합을 바란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 6사단 포병연대장 시절에도 포대별로 방문하였다. 어떤 포대장은 호되게 혼이 나기도 했으나, 부하 포대장들이 포대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휘를 잘하면 좋겠다는 바램이 잘 나타났었다. * [[제6보병사단 포병여단|제6보병사단 포병연대장]] 재임 시 부대 교회로 새벽 기도를 다녔는데 부대 교회로 통하는 88포병대대 2포대 위병소를 통과할 때마다 차에서 내려 직접 장병들을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격려해 주었다 간단한 간식 같은 것을 주고 갔다.[* 통상 주둔지 단위로 교회가 있는데, 연대에는 특이하게 영내교회가 없다보니 제일가까운 부대인 88대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셨다. --반강제 지휘관 주말 현장지도..--] * 2008년 병사들의 전역자 간담회에서 27포병대대 06년 12월군번 전역 예정 병사가 '대대장님께서는 수십년 뒤에 뉴스에서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 27포병대대 시절 부대내 병사들의 재능을 잘 활용하는 지휘관이었다. 동영상 제작 및 편집에 능한 병사(30살에 입대한 08군번 이*수 병사-본인작성-가설병으로 인트라넷서버구축 웹프로그램제작, 정훈병으로 영상제작 연대,사단,군단 파견교육 등 의 보직을 수행)를 발굴하여 함께 상급기관에 보고할 동영상을 제작하기도 하고(실제 운용하는 기기의 능력이 4~6정도라면 엄청난 편집능력으로 10점의 능력을 발휘 하는것처럼 포장을 잘했던거 같음-포병학교 교재영상제작),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병사를 활용하여 한달간 대대에서 발생하였던 소식들을 정리하여 각 포대에 방송하는 "포성뉴스"를 운영하기도 하였다(이*수 병사 복무시기와 대대장 재임시기가 거의 겹침으로 병사 재대후 사라짐). * 위관장교는 1사단 58포병대대에서 복무하였고, 절도있고, 모범이되고, 인간적인 초급장교였으며, '''룸메이트와 의견이 잘맞아 친밀히 지냈다.''' 포술경연대회에서도 항상 1등을 했다. 정말 자랑스럽고 믿음직한 군인이다. 애창곡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 6사단 포병연대장 당시 연대에서 용사들 상점제도를 추진하였고, 이를 가지고 용사들에게 상점(모이면 포상)을 부여하였다. 간부들이 어떤 항목이 상점 몇점인지를 알면 제대로 추진되고 있다고 생각하여 좋아했었다. 또한 용사들을 교류시켜 며칠간 타 부대 생활관에서 생활해보는 걸 추진하였는데, 취지는 서로 다른 부대 문화를 경험하고 서로 보완발전하는 것이었으나.. 추후에는 조리돌림식 부조리 색출로 변질되었다.(해당용사들이 연대장과 간담회를 하면서 건수에 따라 포상을 받았기 때문임..) 그외에도 윤일병/임병장 여파로 인해 용사관리를 제대로 하자는 취지에서 간부 대상으로 용사들 신상관리 경연대회를 추진하려고 했었다.(모 용사는 어디살며 관심사, 관리해야할 사항 등등 인적정보를 외우는 것) * 사단장 이임 후 요직인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차장에 영전하면서 중장 진급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여겨졌으나, 22년 6월 인사에서 [[김규하(육사47기)|김규하]], [[김봉수(군인)|김봉수]] 소장이 진급하였고, 11월 2차 진급에서도 [[강호필]], [[손식]] 소장이 진급하였다. 47기의 2차 진급이 완료된 상황이라 한직인 육군포병학교장으로 전출되었다.[* 보통 포병 출신들은 한 기수당 1명씩 진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전의 전례를 보면 육사 출신 가운데서도 포병 출신으로 중장 이상 진급한 사례도 [[김병관(군인)|김병관]](육사 28기), [[김태영(군인)|김태영]](육사 29기), [[김병주]](육사 40기), [[윤의철]](육사 43기), [[김선호(군인)|김선호]](육사 43기), [[이두희(군인)|이두희]](육사 46기) 등 육사 43기에서만 2명이 진급하고 나머지 기수는 1명씩 진급하였으며, 47기 역시 [[김규하(육사47기)|김규하]](육사 47기)가 먼저 진급한데다 학군 출신 임관동기인 [[고현석(군인)|고현석]] 장군 역시 포병 출신이다보니 진급경쟁에서 밀렸을 가능성이 높다.] 23년 전반기 장군 인사에서 [[김성민(군인)|육사 1년 후배]]가 중장진급을 하면서 3차 진급을 노려봐야 한다. 그러나 23년 후반기 장군 인사에서 [[손식|육사 동기]]가 '''대장진급'''을 하면서 양태봉의 진급은 완전히 끝났다. 이제 제대할 준비를 해야 한다. 애초에 양태봉의 진급은 병과학교장인 육군포병학교장으로 가면서 사실상 좌절되었다.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1969년 출생]][[분류:신한고등학교 출신]][[분류:육군사관학교 출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