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헌용 (문단 편집) === 전조 황후로서의 삶 === 그러던 중 [[영가의 난]]이 터져 수도 낙양이 함락되었다. 회제와 양헌용은 포로로 잡혔는데, [[유총(전조)|유총]]의 일족이었던 [[유요(전조)|유요]]가 양헌용을 아내로 삼았다. 유목민족에게 있어 [[약탈혼]]은 흔한 관습이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드물 뿐 유목민 전체로 보면 드문 일은 아니다. 유요가 황제로 즉위하자 양헌용을 황후로 삼았는데, 유요가 어느 날 양헌용에게 물었다. > "나와 [[사마충|사마씨 꼬맹이]] 중 누가 나은가?" > "어떻게 같이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는 나라를 세운 명군이고, [[사마충|그 자]]는 망국의 [[암군]]이었습니다. 심지어 처자도 보호하지 못했고 황후마저 평민의 모욕을 받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폐하를 보고서야, 비로소 천하에는 사나이 대장부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유요(전조)|유요]]는 매우 기뻐했으며, 양헌용을 총애했다. [[가남풍]]의 악행 때문에 묻혔고 망국의 [[황후]]로 [[오랑캐]]의 아내가 되었다는 점에서 불행한 여자로 여겨지지만, 양헌용도 권력욕이 대단했다. [[사마충]]이 죽고 시동생 사마치가 황제가 되자, 양헌용은 태후로써의 권력을 잡지 못할까봐 안절부절했다. 무엇보다 [[유요(전조)|유요]]에게 전 남편이었던 사마충의 험담을 했고, 나중에 다시 황후가 되자 매우 만족해 했다.[* 물론 전남편 [[사마충]]이 별 볼 일 없는 위인이었고, 자신도 [[팔왕의 난]] 와중에 여러 번 구금되고 폐비되는 등, 고생하긴 했다.] 양헌용이 사망하자 [[유요(전조)|유요]]는 헌문황후라는 시호를 올렸으며, 한 번도 보지 못한 [[장인어른]] 양현지를 위해 영원릉(永垣陵)을 만들어 이장시켰다. 양헌용은 현평릉(顯平陵)에 장사지냈다. 유요는 양헌용을 기리고자 엄청난 돈을 들여 그녀와 그 부친을 위해 능묘를 만든 것이다. 엄청난 수의 백성들이 동원되어 밤낮을 쉬지 않고 건설했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의 희생이 많아지자 원망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대신들은 상소를 올려 그 부당함을 호소했다. > 두 묘는 만드는 비용이 어마어마하여, 하루 6만 명의 백성들이 동원되어 지금까지 6백만 명의 공력이 들어갔습니다. 벌써 3개의 연못을 만들었고, 높이가 100척이나 되는 산만한 언덕이 생겼습니다. 뼈들이 온 땅에 널려 있고 인부들의 탄식소리가 하늘에 닿고 있습니다. 또한 나라와 폐하와 황후에게도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요(전조)|유요]]는 요지부동이었고 끝내 2개의 능을 완성시켰다. 특히 현평릉은 황후가 이미 묻혔지만 나중에 자신도 함께 묻히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 하지만 훗날 유요가 [[석륵]]에게 암살당하고 전조가 멸망할 무렵, 현평릉은 표적이 되어 [[도굴]]되고 철저하게 파괴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