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홍옥 (문단 편집) == 생애 == [[송휘종]] 숭녕 원년인 1102년에 태어났으며 집안은 대대로 장수 출신이었지만 [[방랍의 난]] 때 전투를 이길 시기를 놓쳤다는 이유로 부친과 조부가 목이 달아나 죄인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았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으며 집안이 가난하여 기원으로 들어가서 기녀로 일하다가 그 당시에는 하급 장수였던 [[한세충]]을 만났다가 그가 군대를 지휘하는 위치에 오르게 되자 그의 처가 된다. 이후 한세충이 송고종 건염(建炎) 3년(1129년) 묘부(苗傅)와 유정언(劉正彦)의 반란을 진압했을 때 아들 한량과 함께 묘부의 인질이 되었는데 엄하게 비밀로 하여 지키고 있었다. 이때 주승비가 묘부를 속여 말하길 태후에게 아뢰어 두 사람을 보내면 한세충을 회유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고 묘부가 이를 받아들여 그녀를 안국부인(安國夫人)에 봉해 한세충을 불러들여 영접하려 했는데 양홍옥은 잽싸게 성밖으로 탈출해 한세충과 만났다. 물론 이후 묘부와 유정언은 한세충에 의해 박살... [[송고종]] 건염 4년인 1130년에 남편인 한세충과 함께 명을 받아 경구를 지켰으며 완안종필(완안올출, 완안우추)이 임안을 공략한 후 1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강을 도하해 북쪽으로 돌아가려다가 결국 부부가 주밀하게 배치한 송군과 조우하여 진강에서 회전을 펼쳤다. 양홍옥은 사졸들의 앞장에 서서 십 수장 높이의 망루에 올라 날아드는 화살을 무릅쓰고 친히 북을 울려 작전을 지휘했다. 금군이 비록 군사 수에서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으나 결코 송나라 수군이 친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다. 결국 송군은 밤 사이에 벌어진 십여차례의 격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금군이 장강 도하작전에 실패한 후에 황천탕에서 송군에 의해 철통과 같이 48일간 포위되어 여러 번에 걸쳐 강화를 시도했으나 모두 송군에 의해 거부당했다. 당시 양홍옥은 병사들을 지휘함과 동시에 손수 [[만두]]를 빚어 많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만두의 양이 많지 않으니 마음(心)에 점(點)이나 찍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게 [[점심]], [[딤섬]]의 어원 중 하나라고 한다.[[http://kor.theasian.asia/archives/131039|#]][[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1&aid=0002275977|#]] 한편 완안종필은 그 사이 물길을 뚫어 도주하고 바람이 멈춘걸 기회로 큰 해함이 움직이지 못하자 불화살을 쏘아 송군이 혼란한 틈을 타 돌파하고 절강으로 후퇴했다. 어쨌거나 적은 군사로 10만 대군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는데 양홍옥은 표를 올려 남편 한세충을 탄핵했다. 송고종은 이를 두텁게 위무하고 칭찬했으며 매우 총애해 한세충을 위하여 관직을 더하고 잔치를 베풀었고 또한 양홍옥을 양국부인(楊國夫人)으로 봉했다. 양홍옥이 올린 탄핵표는 남송학자 나대경(羅大經)의 저서 학림옥로(鶴林玉露)에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부인이 전후 황제께 글을 올려, 아뢰니 "세충은 기회를 잃어 적을 놓쳤으니, 죄책(罪責)을 원하옵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