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희(삼국지) (문단 편집) == 생애 == 어려서 자가 공홍(公弘)인 파서군의 [[정기(촉한)|정기]], 자가 계유(季儒)인 [[파(춘추전국시대)|파군]]의 [[양태]], 자가 백달(伯達)인 [[촉나라|촉군]]의 [[장표]]와 함께 이름이 알려졌다. 양희는 항상 정기를 [[천거|추천]]해 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라 주장했고, [[제갈량]]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이후 [[주(행정구역)|주]]의 서좌를 지내다가 20세 즈음에 독군종사가 되어 형벌을 주관하면서 법률에 따라 의심가는 사건들을 처리해 공평하고 타당하다고 평받았다. 승상부 소속 [[주부]]가 되었다가 234년에 제갈량이 죽고 상서우선부랑이 되었으며, 이후 [[장완]]의 초빙을 받아 치중종사사가 되었다가 또 다시 장완의 초빙으로 동조연에 임명되었다가 남중랑참군, 내강 [[도독]]의 부장이 되었다. 건녕 [[태수]]를 겸임하다가 중앙으로 들어가 사성교위가 되었고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간략하면서 번잡함이 없었으며, 241년에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을 편찬했고 257년에 [[강유]]를 따라 [[북벌]](강유의 북벌)에 참전해 망수까지 갔다. 양희는 마음 속으로 강유에게 복종하지 않고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할 때 늘 비웃는 말을 했으며, 이에 강유가 겉으로는 관대하게 대하면서도 마음 속으로 견디지 못해 [[청두|성도]]로 [[뒤끝|돌아온 후에 담당 관리가 강유의 마음을 알고 상주해 양희는 면직되어 평민이 되었다가 261년에 사망했다.]] 장완이 [[재상]]으로 있을 때도 동조연으로 있던 양희는 장완이 말을 걸어도 무시하였고, 이를 본 어떤 이가 양희에게 벌을 주자는 의견을 냈지만 [[대인배]] [[관대하|장완이 관대하게 넘어갔는데]], 이를 보면 상관들에게 한 무례한 행동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영 좋지 않게]] 여겨졌던 듯하다. 그의 성격은 게으르고 일을 허투루하게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아첨하거나 지나친 애정으로 대하지 않았다. 문서로 사무상의 지시를 할 경우에는 종이를 전부 채우는 경우가 드물었다. 옛 친구에 대한 우정은 독실해 두터운 정으로 대했고 어릴 때부터 친한 한엄, [[여도]]를 위해 각종 사무를 하면서 생활을 원조했으며, 또 당시 사람들은 [[초주]]는 그 시대에 맞는 재능이 없다고 말하며 그를 공경하고 귀의(歸敬)하는 사람이 적었지만, 양희만은 그를 중하게 여겨 초주에 대해 우리들의 자손은 키다리(초주)만 못하다고 했고 식견 있는 자들은 이 때문에 양희를 중시했다고 한다. 초주의 제자였던 [[진수(역사가)|진수]]는 양희에 대해 사람들에게서 탁월한 점을 발견하려는 의도로 인물을 평가했지만, 그의 지혜에 결함이 있어 세상을 재난을 만났다고 했다. 이를 보면 양희가 당히 촉한에서 스승을 인정한 몇 안 되는 사람임에도 진수 역시 그의 태도에 대해 영 좋게만은 평가할 수 없었던 듯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