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어린이날 (문단 편집) ==== 광복 이후 ====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어린이를 존중하는 마음을 살리기 위해 《어린이》가 다시 발행되기 시작했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의해 어린이날도 부활했다. 해방 이후 첫 기념식은 1946년 5월 첫째주 일요일인[* 1927년에 변경된 어린이날 날짜를 따랐다.] 5월 5일 오전 11시부터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어린이날 전국준비위원회와 어린이날 서울시준비위원회 공동 주최로 거행되었는데, 천도교소년회, 조선소년운동중앙협의회 등 18개 소년 단체에서 수천 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4명의 남녀 어린이가 다시는 집도 말도 빼앗기지 않고 새날 새 조선의 주인으로서 열심히 배우겠다는 「소년소녀의 선서문」을 낭독했다. >우리는 왜족에게 짓밟혀 말하는 벙어리요 집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집과 우리 글을 찾기로 맹세합니다. >우리는 새 조선 건설의 일꾼이요 새날의 임자인 것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집도 빼앗기지 않고 말도 잃지 않기로 굳게 기약합니다. >우리는 왜적으로 해서 다른 나라 어린이보다 너무도 뒤쳐졌습니다. 우리는 배우고 또 배워서 다른 나라 동무들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조선의 어린이인 것을 잊지 않고 단단하고 끈끈하게 뭉치겠습니다. >---- ><현대일보>, 1946년 5월 6일 해방 뒤 첫 어린이날인 [[1946년]] 5월 첫 번째 일요일이 5월 5일이었는데, 날짜가 달라지는 불편을 막기 위해 1946년 이후로는 요일에 관계없이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했고, 이 날짜가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다. 이후의 어린이날 기념식은 민간단체의 주도로 어린이들이 참가하여 희망이나 포부 따위를 말하고, 모범 어린이를 표창하거나 음악, 무용, 사생, [[백일장]] 같은 대회를 열며 진행되어 오다가, 1953년부터는 점차 관주도의 행사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