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엄백호 (문단 편집) == 정사 == 정확한 [[이름]]은 불분명하다. 엄백호라는 이름이 제일 유명하지만 사서에서는 엄백호(嚴白虎) / 엄호(嚴虎) 둘 다 동일인물의 이름으로 나온다. 일부 사이트에선 이에 대해 엄호가 이름이며 백호가 별호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출처는 불분명하다. 《[[주치(삼국지)|주치전]]》에는 '[[산적]](山賊) 엄백호'라고 기록되었지만, 중국의 역사가 탕장루(唐长孺)[* 생몰년도: 1911년 ~ 1994년]는 자신의 저서《위진남북조사논총(魏晋南北朝史論叢)》에서 산적이 [[산월]](山越)과 뜻이 같으며 엄백호는 산월의 족장이었다고 주장한다. 《[[손책]]전》에 따르면 엄백호 등은 각자 '''무리 1만 여 명'''씩 거느리고 곳곳에 모여 있었다. [[오경(삼국지)#s-1|오경]] 등이 먼저 엄백호 등을 격파하고 그 다음 [[회계]]로 모이길 진언했다. 그러나 손책이 말했다. >엄백호 등은 단순한 도적 무리일 뿐, 큰 뜻이 있는 자들은 아니니, 이에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손책은 엄백호를 [[도적]] 무리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회계의 [[왕랑#s-1]]을 먼저 공격했다. 엄백호는 [[주치(삼국지)|주치]]에게 져서 도망친 [[허공(삼국지)|허공]]을 받아들인 후 손책의 공격을 받는다. 화친을 위해 [[동생]]인 [[맹장]] [[엄여]]를 보냈으나 [[손책]]은 그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 《호주부성지고(湖州府城池考)》에 따르면 현성에서 동남쪽으로 24리 떨어진 곳에 있는 주성은 엄백호의 [[사위]]인 [[주숙렴]]이 쌓았다. 또한 일명 성산이라고도 하는 석성산은 현성에서 남쪽으로 50리 지점에 있으며, 높이가 90장이고 둘레가 5리이다. 엄백호가 이 [[산]] 위에 [[성]]을 쌓고 [[여몽]]과 대치하였다. 이렇게 [[손책]]과 계속해서 싸운 것으로 보이나 결국 패하면서 도망쳐 [[허소#s-3]]에게 의탁한다. [[정보(삼국지)|정보]]가 도망간 엄백호를 공격할 것을 청했으나 손책은 허소의 의로움을 감안해서 치지 않았다. 손책이 엄백호를 공격한 이유는 반(反) [[원술]] 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때, [[진우(삼국지)|진우]]가 몰래 손책을 치려고 [[조랑]], 엄백호 등에게 내부에서 호응하게 하고 손책이 원술과 싸우는 그 순간 공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여범]]전》에 따르면 이를 알아챈 손책은 직접 엄백호를 토벌하러 가고, 별도로 [[여범]], 서일을 파견하여 해서에서 진우를 공격하도록 했다고 한다. 엄백호의 최후는《[[정사 삼국지]]》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건강실록]]》에서는 엄백호가 항복하자 손책이 엄백호를 살해했다고 기록되어있다. [[200년]], [[관도대전]]이 발발하자 손책은 [[허도]]를 급습하기 위해 북상했고 [[진등]]과의 접전이 이루어진다.《손책전》주석《강표전》에 따르면 진등은 몰래 인수를 엄백호의 잔당에게 주고 결탁해서 손책을 해칠 것을 모의하기도 했다. 잔당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보면 이때 엄백호는 이미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진령위업도(眞靈位業圖)》에는 역사 인물이 [[도교]]의 신선으로 7단계로 나뉘어 기재되어 있는데, 제일 낮은 단계인 제 7위 중에 엄백호의 이름도 있다. 그러니까 엄백호는 '''죽어서 [[신선]]으로 섬겨진 것이다. '''보통 손책이 처리한 인물들은 악당 내지 심하면 희화화까지 되지만, 실제로는 민간에서 나름대로 인망이나 영향력이 있었던 모양.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