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엄복동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1913년 4월의 "전조선자전거경기대회"로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사가 서울 용산 연병장에서 개최한 이 대회는 서울(용산), 인천, 평양의 3곳에서 벌어진 전국 규모의 대회로, 당시로선 경이적인 규모인 10만 명의 관객이 운집했다고 한다. 이때 엄복동은 '''중고 자전거 끌고 털레털레 나와 우승'''을 차지하고, 이후 열리는 자전거 대회마다 다 휩쓸고 다니게 된다. 엄복동이 자전거 경기에서 항상 골 직전 한 바퀴 남았을 때 '''"엉덩이를 들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관중들은 엄복동의 모습에 '''"올라간다!"'''라며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는것을 보고 환호했다고 한다. 이는 마지막 1바퀴가 남았을 때 스프린팅을 쳤던 것으로 추정되고, 다른 선수들은 스프린팅의 개념에 대해 잘 몰랐을때 혼자 기술을 적용한것으로 보인다. 상기 실 사진에서도 체형을 볼 때 허벅지의 대퇴사두근은 옷에 가려 잘 보이지 않으나 장딴지로 추정해 보면 스프린터의 성향이 강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아직 국내 경기 중에는 오르막을 오르는 등의 산악구간 경기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경기도 트랙 혹은 드물게 구간경기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일본의 [[우민화 정책]]이 극을 달하던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과 함께 전국적인 애국, 계몽운동, 의병들이 한창 일어나던 시절 우민정책(愚民政策)의 일환으로 당시 조선인들의 기를 꺾고자 잘나가던 엄복동을 밟아주기로 결정한 일본은 1920년 5월 2일 일본의 고수 모리 다카히로까지 초청해서 경성시민대운동회의 자전거 경기를 열게 된다.[* 사실 열강들이 식민지에 우월감을 과시하고자 많이들 이랬다. 일본은 중국과 조선에서 자주 했고, 영국은 [[크리켓]]으로 인도 팀과 경기를 가졌다가 그만 져서 망신을 당해 이 실화는 인도에서 라간이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서 축구로 이짓을 했다가 크게 고전하면서 이러다간 우월감은 커녕 망신만 당하겠다고 인도네시아 인들과 네덜란드 팀은 축구 경기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축구에서 조선도 만만치 않아 1930년대만 해도 일본인이 들어간 팀이랑 경기를 하면 조선인 선수들은 작정하고 말 그대로 일본인 선수의 다리를 불구로 만들 의도로 격투기 축구를 신나게 일본인들에게 선사했다고 한다. 결국 일본도 조선인들과 축구 경기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엄복동이 모리 다카히로를 이겨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에 일어난 상황은 경성자전거 경기 때 있었던 일에 대한 동아일보의 1920년 5월 3일자 기사가 가장 당시 상황과 감정을 잘 전달해 준다. 조선을 털러 왔다가 역으로 털리자 억지 판정을 내리려 했다는 내용이다. >여덟 사람이 용기를 다 바쳐 주위를 돌 때, 다른 선수들은 불행히 중도에서 다 뒤떨어지고, 오직 선수 엄복동(嚴福童)과 다른 일본 선수 한 사람만 그나마 승부를 겨루게 되었는데, 그것도 엄복동은 삼십여 바퀴를 돌고, 다른 일본 사람이 엄 선수보다 댓 바퀴를 뒤떨어져, 명예의 일등은 의심없이 엄 선수의 어깨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심판석에서는 별안간 중지를 명령함에 엄 선수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것은 꼭 협잡으로 내게 일등을 아니 주려고 하는 교활한 수단이라!"''' >부르짖으며 우승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들어 >'''"이까짓 우승기를 두었다 무엇하느냐!"''' >고 우승 깃대를 잡아꺾으매, 옆에 있던 일본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들어 엄 선수를 구타하니 마침내 목에 상처가 나고 피까지 흘리게 되매, 일반 군중들은 소리를 치며 엄복동이가 맞아 죽는다고 운동장 안으로 물결같이 달려들어서, 욕하는 자, 돌 던지는 자, 꾸짖는 자 등 분개한 행동은 자못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다행히 경관의 진압으로 군중은 헤치고, 대회는 마침내 중지가 되고 말았는데, 자세한 전말은 추후 보도하겠으나 우선 이것만 보도하노라. 이후로도 열린 경기에서 신나게 일본인들을 발라버리며 우승하였고, 이는 당시 비행기 조종사였던 [[안창남]](安昌男·1900~1930)과 더불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세간에는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라는 '안창남 비행기'라는 노래[* [[민요]]인 '청춘가'라는 노래를 개사한 곡이다.]가 불릴 정도로 둘의 인기는 엄청났다. 동아일보 1925년 6월 9일자(3면)는 단평(短評) 코너에서 일본인들의 행태에 대해 아래의 기사로 비꼬기도 했다. >일본 상인들은 목전(직전) 자전차 경주에서 조선인에게 일등을 빼앗겨서 분하다 하여, 일본에 있는 선수들을 전부 불러와(招致) 자전차 경주회를 연다고. 또 지면 분해 죽기나(憤死) 할는지. 1928년 6월 25일 평양 조선인 윤업조합 주최 제2회 전조선 자전차대회 예선 1위 이후엔 35년 전주 자전거경기회와 함흥자전거경기, 38년 경북 안강 윤업조합 주최 경기 등의 참가가 기사화되었으나 등수에 들지 못했다. 47년에는 런던 올림픽출전자격을 놓고 벌이는 자전거대회를 원로자격으로 관람하고 기념품을 받았다. 1949년 7월 대한자전거경기연맹주최 제1회 전국 자전차 급종별 경기대회에서 노장 3천 미터 1위를 끝으로 공식 경기기록은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7270020920202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7-27&officeId=00020&pageNo=2&printNo=7977&publishType=00020|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