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엄항섭 (문단 편집) === [[8.15 광복]] 이후 === [[파일:external/046aad7e7a0c88943abb5a5ab140f00cf49a502862bec86196f6cf5ca32a3528.jpg|type=w646]]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광복을 맞이한 [[김구]] 선생(앞줄 왼쪽 5번째)과 임정 요인들이 환국을 앞둔 1945년 11월 3일 촬영한 사진. 김구 선생 왼편이 엄항섭선생(앞줄 왼쪽에서 4번째)이다.(『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4, 2011) 광복 후 11월 3일 임시정부 환국 제 1진의 한 사람으로 상하이 비행장을 출발해 비행기편으로 [[김포공항]]에 착륙하였다. 귀국해서도 김구를 따라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선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취임사에서 그는 '우리 소년군은 오늘과 같이 길러온 유지들을 중심으로 진행할 방침인데 일반 사회에서도 많은 원조를 해주기 바란다.'라고 발표하였다. 1947년 12월 이후 김구가 남북협상으로 전환하면서 그 역시 노선을 전환, 1948년 4월 20일 남북협상에서 한국독립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김구가 이승만과 결별하자 김구를 따라 1948년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함께 참가하는 등 계속 김구의 측근으로 활동하다가 김구 사후에는 지인들과 멀리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해 갔다. 김구가 남북협상 노선을 선포한 이후 [[신익희]], [[이시영(정치인)|이시영]], [[이범석]] 등 상당수 임시정부 인사들이 김구 곁을 떠났고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조소앙]]마저도 결국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사회당을 창당해서 김구를 떠났지만 엄항섭만은 끝까지 김구의 노선을 따랐을 정도로 임시정부 인사들 중에서도 김구의 최측근이었다. 엄항섭의 막내딸 출생지가 경교장 근처일 정도로 [[김구]]와 가깝게 지냈다. 그런데 해방 초에 [[미군정]]에 일하는 한인 직원들에게 반탁을 위한 파업을 부탁했는데,[[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11200329111001&edtNo=20&printCount=1&publishDate=1995-01-12&officeId=00032&pageNo=11&printNo=15309&publishType=00010|그 결과 미군정 직원들이 파업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김구는 엄항섭에게 부탁해 파업중지 방송을 권고했다.]] '우리의 투쟁은 미군정에 대한 것이 아니라 탁치에 반대하는 것이며, 워싱턴에서 온 전문에 따르면, 탁치를 실시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니 미군정 관리를 포함한 모든 조선인들은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업무에 복귀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화가 난 [[존 하지]]는 김구를 협박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0_DankookU_0.jpg]] [[단국대학교]] 설립시 김구와 격려차 방문 1948년 1월 18일 낙원동. 앞줄: [[김구]], [[장형(독립운동가)|장형]], 뒷줄: [[장도빈]], 엄항섭, [[양주동]], [[김정실]], 박정숙 1947년 3월 건립된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에서 강사와 부소장을 맡기도 하였다 양성소의 매기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다. 교육기간은 제1기가 2개월이었고, 제2기부터 마지막 교육을 받은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다. 교육내용은 독립운동사·정치·경제·법률·헌법·역사·선전·민족문화·국민운동·철학·약소민족문제·농촌문제·협동조합·사회학·공산주의 비판·여성문제 등과 특별강의였다. 1948년 12월 제5기 수료생 명부에 따르면 명예소장 이승만, 소장 김구, 부소장 엄항섭, 이사장 장형으로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강사는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신익희]](申翼熙)·[[지청천]](池靑天)·나재하(羅在夏)·김성주(金成柱)·김경수(金敬洙)·최호진(崔虎鎭)·[[김정실]](金正實)·[[양주동]](梁柱東)·민영규(閔泳珪)·[[엄상섭]](嚴詳燮)·엄항섭(嚴恒燮)·[[김학규]](金學奎)·설의식(薛義植)·김기석(金基錫)·이상조(李相助)·주석균(朱碩均)·홍병선(洪秉璇)·김하선(金昰善)·김석길(金錫吉)·[[안재홍]](安在鴻)·[[정인보]](鄭寅普)·황기성(黃基成)·[[이인]](李仁)·[[김활란]](金活蘭)·[[김법린]](金法麟)·[[박순천]](朴順天)·[[이은상(시인)|이은상]](李殷相)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이때 엄항섭은 친분이 있던 김정실, 양주동과 함께 강사로 참여하였다. 1949년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육군포병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권총으로 살해된 김구암살사건(金九暗殺事件)이 발생하여 건국실천원양성소의 본부였던 원효사는 1948년 9월 [[홍익대학교]]가 인수했지만 김구가 암살된 후, 해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