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엄항섭 (문단 편집) === [[6.25 전쟁]] 이후 === 그는 6.25 전쟁 이후 납북되었는데, [[조소앙]]과 함께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가입하여 그 해 7월 상임위원 겸 집행위원에 취임하여 활동했다. 하지만 저 단체는 말 그대로 얼굴마담이었다. 북한에 억류된 [[한국독립당(1940년)|한국독립당]] 인사들 중에서는 제일 젊었다.(50대) 1958년 9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주장한 통일방안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판단한 북한당국은 납북인사들을 탄압, '엄항섭, [[명제세]], [[노일환]]' 등에 반혁명분자라는 혐의를 씌어 연행한다. 이것이 바로 북측이 자행한 '엄항섭(嚴恒燮) 사건'으로 엄항섭 등을 체포하자 함께 납북됐던 조소앙은 조작이라며 이에 항의하여 단식투쟁을 벌였다. 단식투쟁 중 병을 얻어 1958년 9월 10일 조소앙은 타계했다고 알려져 있다. 엄항섭은 [[북한]]에서도 [[남북통일]]을 위해 진력했다고 하며 납북인사들 중에서는 [[조소앙]]과 함께 가장 강력히 [[김일성]] 1인 독재체제에 저항했으나, 결국 1962년 7월 30일 평양에서 [[홧병]]에 따른 [[고혈압]]으로 외롭게 숨을 거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91년 10월 1일 공개된 전 북한 정무원 부부장(차관급)을 지내다가 1980년대 중반 망명한 박병엽(朴炳燁, 필명 신경완申敬完)의 구술기록 참조.[[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1002002391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1-10-02&officeId=00023&pageNo=1&printNo=21769&publishType=00010|#]]] 198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봉안되었다. 또한 1990년 8월 15일 북한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파일:external/file.newswire.co.kr/2006032911435937820.75952200.jpg]] 엄항섭의 묘.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