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르제 (문단 편집) === 청년기 === [[파일:external/www.tintinkor.wo.to/scout1927.jpg]] 중등 교육기에 가톨릭계 학교인 생 보니파스 학교를 다녔으며 명석하여 전체적으로 성적이 우수하였는데, 자신이 자신있다고 생각했던 [[미술]]만 낮게 나와서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림 그리길 계속했고, 학교에서 진행하는 [[보이스카우트]]에 참여하여 단장을 맡으면서 왕성한 활동을 해서 "호기심 많은 [[여우]](Renard Curieux)"라 불릴 정도였으며, 이로 인해 보이스카우트 총지도자의 눈에 들어 학교 스카우트 신문인 Jamais assez에 처음으로 만화를 연재를 시작, 월간지인 벨기에 보이스카우트지에도 만화를 연재하게 되었다. 1925년에 중등학교를 졸업한 에르제는 천주교 보수계열 신문인 "20세기 신문(르 벵티엠 시에클)"으로 들어가서 정기구독부에 취업해서 업무를 수행하면서 일러스트를 병행했다. 이 때 "풍뎅이 순찰대장 토토르"를 연재했다. 그러다가 에르제의 부모가 에르제를 그림쪽으로 나가게 할려고 생뤼크(Saint-Luc) 학교를 보냈는데, 에르제는 교육방식이 자신과 맞지 않다며[* 특히 누드화 그리는 걸 싫어했다고 한다. 실제로 에르제는 생전에 스스로 인체묘사에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나리오 저술에 많은 공을 들였다.] 조금 다니다가 그만뒀다. 그리고 1년간 군대에 있다가 다시 20세기 신문으로 돌아와서 활동했는데, 신문국장인 왈레즈 신부[* 이 양반은 무솔리니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당시에는 유럽의 종교계 인사들이 파시스트가 되는 우를 범하는 일이 많았다.]의 눈에 들어왔다. 이 덕에 새로 간행되는 어린이 정기 부수매체인 소년 20세기 편집장을 맡게 되고, "플륍, 네네스, 푸세트, 코쇼네의 모험"을 연재했다. 그리고 국장이 "천주교계 기자로 세계에 선을 행하는 소년 영웅"을 창작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요구를 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929년 1월 10일, "땡땡의 모험" 첫번째 작품인 "소비에트에 간 땡땡"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파일:external/img45.xooimage.com/img019-1be04c1.jpg]] (소비에트에 간 땡땡을 연재한 해, 1929년의 에르제) "땡땡의 모험"은 뜻밖으로 매우 성공적이어서[* 이는 에르제 본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얼마나 성공적이었느냐면, 소비에트에 간 땡땡 편이 끝나자 20세기 신문사 측에서 북역에서 땡땡과 밀루가 귀환하는 것을 코스프레 해서 그대로 보여주는 이벤트를 모였는데 마지 소비에트에 간 땡땡 마지막 장면 처럼 북역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서 경찰이 동원되었다.] 계속 연재를 하게 되었다. [[http://www.tintinkor.wo.to/images/herge/1930retourpaysdessoviets.jpg|당시 북역 행사를 찍은 사진]] 이후로 에르제는 콩고에 간 땡땡, 미국에 간 땡땡, 파라오의 시가를 계속 연재하였다. 그리고 1932년, 에르제는 가톨릭 신부 노르베르 왈레즈[* 1884~1952. 반공·친파시즘 성향으로 보수우익이었고 [[나치]]를 지지하는 통에 [[벨기에]] 침략에도 긍정적인 기사를 쓰게 했다. 결국 2차 대전 이후 나치 협력자로 4년 동안 복역하고 20만 프랑 벌금까지 내면서 몰락했고 이후 [[암]]으로 죽었다.] 신부의 중매를 통해 왈레즈 신부의 비서인 제르멘 키켄스와 결혼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