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스페란토 (문단 편집) == 역사 == 자멘호프가 태어난 [[폴란드]] 북동부의 [[비아위스토크]](Białystok)시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서 [[폴란드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독일인]], [[유대인]] 등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었는데[* 1897년을 기준으로 비아위스토크의 언어 사용 상황을 보면, [[이디시어]]가 62%, [[폴란드어]]가 17%, [[러시아어]]가 10%, [[독일어]]가 5%, [[벨라루스어]]가 3%를 차지하고 있었다. [[http://demoscope.ru/weekly/ssp/rus_lan_97_uezd.php?reg=354|#]] 다만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전후 강제 이주 등을 겪으면서 현재는 인구의 97%가 [[폴란드인]]이다.] 이들 사이의 반목이 극심했다.[* 지금에서야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국력에 의해 영어가 국제 공용어로 쓰이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유럽 밖에서 그나마 힘 있는 미국도 유럽에 비해 약했고 나머지 영연방 국가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당대의 초강대국인 영국도 정작 유럽 내에서는 지금의 미국처럼 압도적인 국력으로 군림할 정도가 아니었다. 또한 유럽 땅에 여러 나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긴 하지만 이웃나라 이외에는 교류가 제한적이다 보니, 외교관이나 무역하는 사람만 여러 언어를 구사하면 되었기에 의사소통의 필요성이 크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런 외교관의 언어에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로 라틴어를 완전히 대체한 프랑스어가 있었다. 프랑스어의 [[링구아 프랑카]] 현상은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을 필두로 영미권의 힘이 강력해지면서 영어가 대체한다.] 박사는 그 원인을 언어 소통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언어학적 지식을 총동원해서 누구나 배우기 쉽고 소통이 용이한 언어를 만들고자 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에스페란토이다. 자멘호프는 언어학자가 아니라 안과 의사였다. 하지만 유년 시절부터 언어에 소질이 특출나서 [[이디시어]]와 [[폴란드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어]]와 [[라틴어]], [[영어]] 등도 배웠다. 당시 상황이 상황이라 [[러시아어]]도 모국어에 가깝게 사용했다. 오죽하면 자신이 한때는 위대한 러시아 문인이 되고 싶었다고 술회할 정도이다. 1878년 에스페란토의 시험판인 '린그베 우니베르살라'(세계어)를 만들어 고등학교 동급생에게 가르쳤다. 그 후 6년간 여러 문학 작품과 시를 번역하며 언어를 발전시켜 나갔다. 1887년 최초의 에스페란토 서적인 <첫 번째 책>(Unua Libro)를 발표했다. 이 책에는 에스페란토의 문법과 어휘, 예문과 자멘호프의 창작 시 두 수가 실렸다. 에스페란토는 발표되자마자 당시 국제 인공어계의 주류였던 [[볼라퓌크]]를 누르고 대표적인 인공어로 발돋움하기에 이른다. 1905년 프랑스 볼로뉴 쉬르 메르에서는 첫 번째 에스페란토 세계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에스페란토 문법을 자멘호프의 '에스페란토 기초'에서 변경하지 못하도록 하는 선언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이후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며 음운과 문법 등 여러 부분에서 미약한 수준이지만 변화가 이루어졌다. 1920년 1차 국제 연맹 총회에서는 에스페란토를 국제어로 각 회원국의 공립 학교에서 가르치자는 결의안이 올라오기까지 했지만 프랑스의 반발로 통과되지 못했다.[* 당대에는 [[프랑스어]]가 영어보다 일찍 [[링구아 프랑카]]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특히 외교 부문에서는 그 위상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외로는 1908년부터 [[중립 모레스네]]에서의 공용화 시도가 있었고, 국내외로 어느 정도 호응도 이끌어냈다. 그러나 나라가 얼마 안 가 독일에 점령되면서 무산되었다. 당시에는 에스페란토를 전파할 수 있는 수단이 겨우 2가지뿐이었다. 직접 만나거나 아니면 편지를 보내거나.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그 사이에 터진 [[대공황]] 등으로 에스페란토는 대위기를 맞았다. 이 시기 유럽에 퍼진 [[전체주의]], [[국가주의]], [[나치즘]], [[파시즘]]은 언어를 근본으로서 국가의 장벽을 없애려는 목표를 지닌 에스페란토의 확산을 경계했고, 결정적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에스페란토를 '유대인의 모략'이라고 주장하며 에스페란토 운동은 직격탄을 맞았다. 하필 에스페란토의 창시자인 자멘호프가 유대계라는 점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고, 이로 인해 [[독일]], [[포르투갈]], [[소련]][* 레닌 시절만 해도 에스페란토는 소련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했으나 스탈린 이후 강제 동화 정책이 실행되고 탄압받았다.] 여러 지역에서 에스페란토는 박해를 받았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81400209101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8-14&officeId=00020&pageNo=1&printNo=5281&publishType=00010|1935년 나치 독일이 내린 에스페란토 금지령에 관한 기사.]] 정작 자멘호프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내세우지 않던 사람이었고, 오히려 반[[시오니즘]]에 가까운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나치한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결국 나치는 1942년 라인하르트 작전[* 폴란드 유대인 절멸 작전.] 당시 자멘호프의 세 자녀까지 잡아들여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에서 살해했다. 그나마 손자가 탈출하여 자멘호프가의 핏줄은 끊기지 않았고,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던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는 1947년에 들어서야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스페란토에 대한 박해는 1950년대까지도 계속되었다. 한편 유럽에서의 혼란상이 계속되는 동안,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미국이 기존 유럽 열강의 헤게모니를 새롭게 장악하면서 영어가 자유 진영의 [[링구아 프랑카]]가 되었고, 이는 공산 진영의 몰락 이후 더욱 공고화되었다. 영어는 [[표기 심도]]나 불규칙 활용 등의 어려운 요소들이 있지만, 그나마 인도유럽어 중에서는 굴절이 심하지 않았기에 별 어려움이나 거부감 없이 세계 공용어로 학습되고 전파되었다. 언어 자체의 특징으로나 전파 방식으로나 유럽 세력의 영향력에 기대는 면이 컸던 에스페란토는, 그렇게 제도화된 국제어가 될 수 있는 적기를 놓쳤다. 그나마 현대, 특히 2000년대 들어서는 [[인터넷]]의 발달로 에스페란토의 보급과 확산이 더욱 쉬워졌다. [[https://lernu.net|lernu!]]나 에스페란토판 [[위키백과]] 등의 인터넷 사이트, Kurso de Esperanto 등의 프로그램, 그리고 [[듀오링고]] 같은 앱 등이 에스페란토 사용자와 학습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비록 20세기 초(세계 대전 이전)와 같은 수준의 열기는 아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에스페란토 운동에 참가하고 있다. 인터넷 등의 도구뿐만 아니라 [[게임화]] 등의 방법론도 나와 있어, 에스페란토 학습의 용이성은 초창기보다 오히려 나아졌다. [[구글 번역]]도 에스페란토를 지원하고 심지어 [[ChatGPT]] 같은 서비스에서도 [[https://www.reddit.com/r/Esperanto/comments/zevb5l/asked_chatgpt_if_it_can_speak_esperanto_loved_the/|에스페란토를 지원한다.]] [[https://www.reddit.com/r/Esperanto/comments/1083bbt/esperanto_and_the_machine/|ChatGPT의 성능은 구글 번역보다 조금 더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2014년에는 세계 에스페란토 축구 협회의 주도로 에스페란토 축구 팀(Esperanta teamo de futbalo)이라는 다국적 축구팀이 창설되었다. 홈 구장은 [[슬로바키아]] [[니트라]]에 있으며, 국가대표팀이 아니므로 [[FIFA]]가 아닌 [[NF-Board]]에 소속되어 있다. 2017년 서울에서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가 열렸을 때 동대문 팀을 상대로 1대 0으로 승리한 바 있다. 에스페란토는 아직 인지도나 사용자층 면에서 미진한 점이 있지만, 영어에 비하면 무국적성이 강하기 때문에 국제어로서의 명분은 남아있다. 이는 에스페란토 운동을 이어나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아시아는 [[한중일]]에서 특히 에스페란토 운동이 활발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