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우제비우 (문단 편집) === 국가대표 경력 === 에우제비우의 첫 월드컵은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16개국 본선이었으며, 사실 포르투갈의 첫 월드컵이기도 하다.[* 에우제비우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이다. 포르투갈은 66년 이후 86년 그리고 2002년부터 연속으로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고 있다.] 이전까지 포르투갈은 유럽 최약체로 분류되었지만 에우제비우의 등장과 동시에 유럽 월드컵예선을 통과할 전력을 갖춘것. 에우제비우는 전 시즌에 흑인 최초로 [[발롱도르]]를 수상하고 강호의 [[체코 축구 국가대표팀|체코슬라바키아]][* 체코슬라바아는 직전 대회인 1962년 월드컵 2등을 기록한 강팀이였기에 이 조에서 본선 진출 가능성이 가장 높은 팀이였다.] ,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루마니아]], [[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튀르키예]]와의 지역 예선에서 6경기 7골[* 터키와의 홈경기에서 해트트릭, 원정 경기에서 결승골, 체코 원정 경기에서 결승골, 루마니아와의 홈 경기에서 결승골과 쐐기골]을 기록하며 포르투갈을 월드컵 본선으로 이끄는 등 폼이 최고로 올라온 상태였다. 포르투갈의 월드컵 16개국 본선 조별리그 상대는 [[불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불가리아]],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 그리고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지금이야 [[불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불가리아]]와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는 유럽축구 약체에 속하지만 1960년대의 불가리아는 월드컵 16개국 본선에도 여러차례 진출하며, 유럽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CSKA 소피아의 멤버들이 대거 포진한 세계랭킹 15위권, 헝가리 또한 전성기의 [[매직 마자르]]에는 못미치지만 세계랭킹 10위권내에 들었으며 [[플로리안 알베르트]]와 페렌츠 베네라는 슈퍼스타들을 앞세운 강팀이었다. 물론 브라질은 말할것도 없었다. 직전 대회 우승팀이자 [[펠레]]와 펠레를 받쳐주는 [[가린샤]]를 앞세워 이번에도 강력한 월드컵 우승 후보이자 3연패 달성 가능성이 높은 팀이였다. 포르투갈에도 잘나가던 벤피카의 멤버가 대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에우제비우, 토히스, [[마리우 콜루나|콜루나]]라는 스타 플레이어들이 존재하였지만 이전까지 세계대회에서 족적하나 남긴적없던 포르투갈은 월드컵 3조의 약체국으로 분류되었으며 그렇게 무난하게 포르투갈은 조별 예선에서 탈락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포르투갈을 이끄는 에우제비우는 헝가리를 상대로 승리, 불가리아전에는 득점까지 기록하며 2전 전승을 기록하였다. 대망의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는 바로 [[펠레]]가 버티는 브라질. 하지만 당시 펠레는 16강 조별리그 1차전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 당한 부상의 여파로 인해 헝가리전에는 출전하지 못하였으며,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도 포르투갈 선수의 태클로 인해 부상을 당해 결국 경기 도중에 경기장을 빠져나와야 했다. 그리고 펠레가 빠진 이 경기를 에우제비우는 자신의 독무대로 만들게 된다. 에우제비우는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2골을 기록하는 등 에이스로서 팀의 공격을 이끌었으며 그렇게 이번 대회 강력한 우승 후보이자 펠레의 브라질을 집으로 돌려보내는데 성공하였고 결국 8강에 진출하게 된다.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킨 두 팀이 8강전에서 격돌했다. 바로 포르투갈 VS 조별 예선에서 강호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를 격파해내는 놀라운 [[업셋]]을 이루어낸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북한]]. 그리고 1966년 7월 23일 리버풀 [[구디슨 파크]]에서 벌어진 북한과의 8강전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팀들답게, 시합 내용 또한 명승부였으며 에우제비우는 다시 한번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시합'''을 치른다. 포르투갈이 전반 25분 만에 3골을 내주며 이탈리아와 함께 북한의 이변의 희생양이 될 뻔하다가, 에우제비우가 전반전 2골, 후반전 2골 총 4골을 몰아쳐서 4-3까지 역전시켰고 결국 최종적으로 5-3 승리를 거둔다.[* 에우제비우의 골에 맞춰 북한 아나운서가 "유세비오의 골입니다, 유세비오가 넣었습니다, 또 유세비오, 아, 또 유세비오..." 이런 식으로 비통하게 탄식했다고 한다.] 말그대로 에우제비우 원맨쇼.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웸블리에서 펼쳐진 잉글랜드와의 4강전을 패배한 뒤 슬퍼하고 있는 에우제비우.jpg|width=100%]]}}} || 이렇게 북한과의 힘든 사투 끝에 [[웸블리]]에서 만나게 된 4강 상대는 바로 이번 월드컵의 개최국인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 잉글랜드의 [[바비 찰튼]]은 당시 최고 전성기를 맞고 있었고 포르투갈은 2골을 먹히게 된다. 에우제비우가 후반에 [[페널티 킥]] 만회골을 넣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야신을 상대로 PK득점에 성공한 에우제비우.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기후 야신과 함께 있는 에우제비우.webp|width=100%]]}}}|| 그래도 3·4위전에서도 전설적인 골키퍼 [[레프 야신]]의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소련]]을 상대로 에우제비우가 페널티 킥 득점을 기록하면서 2-1로 승리하였고 팀의 3위를 이끈다. 본인의 첫 월드컵이자 포르투갈 역사상 첫 월드컵에서 [[펠레]]의 브라질을 3:1로 격파하는 등 대단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바로 월드컵 3위라는 엄청난 호성적을 낸것이다. 게다가 에우제비우의 활약은 그야말로 혼자서 팀을 이끌다시피했고 전세계가 에우제비우의 활약상에 찬사를 보냈다. 에우제비우는 9골을 넣으며 이 대회 득점왕에 등극하였으며 해당년도 [[발롱도르]] 2위에 오른다.[* 1위는 월드컵 우승을 이끈 [[바비 찰튼]]. 그마저도 찰튼과 고작 1포인트 차이로 2위였으니 에우제비우의 무시무시한 활약을 가늠할수있다. [[ https://en.wikipedia.org/wiki/1966_Ballon_d%27Or|1966년 발롱도르 포인트]]] 그 유명한 [[발롱도르]]를 시상하는 프랑스 축구 전문지, 프랑스 풋볼에서는 [[1994 FIFA 월드컵 미국|1994년 미국 월드컵]]이 개최하기 직전 첫 번째 월드컵인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에서부터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까지 참가했던 선수들의 활약상을 토대로 일명 “월드컵 100명의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통해 월드컵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활약상을 펼친 선수들의 순위를 1위부터 100위까지 매겨놓았는데 이 순위에서 에우제비우를 18위에 올려놓았다. 이 순위는 무려 조국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바비 찰튼]]과 네덜란드 [[토탈 풋볼]]의 야전 사령관으로 활약하며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킨 [[요한 크루이프]]보다도 높은 순위이다.[* [[https://www.rsssf.org/miscellaneous/ff-wc100.html|RSSSF 아카이브]]] 심지어는 선수들의 경기 평점을 매기는 평점 전문 사이트 소파 스코어는 1966년 당시 에우제비우가 보여준 활약상을 평점 8.8점으로 메기며 역대 월드컵 최고의 퍼포먼스 1등으로 선정하기까지 하였다.[* [[https://www.fmkorea.com/search.php?mid=best&search_target=title_content&document_srl=5220742052&search_keyword=에우제비우&listStyle=webzine&page=1|출처]]] 이렇듯 에우제비우의 당시 활약상을 못봤더라도 어느정도 였을지 짐작은 가는 부분이다.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블랙팬서 에우제비우.jpg|width=100%]]}}}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