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콰도르 (문단 편집) == 역사 == 고대에는 남미에서 발달된 지역인 페루나 콜롬비아 중남부와 인접해있던 탓에 기원전부터 문명이 발달했으며 서기 8세기부터 16세기 중반까지 상당히 발전된 형태의 국가들이 존재했으며 유물들도 출토된다. 다만 이 당시의 역사기록물은 없기 때문에[* 메소아메리카 지역과 다르게 남미 서부지역은 문자가 사용되지 않거나 사용되더라도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잉카 제국 이전의 역사를 연구하기에 상당한 애로사항이 꽃핀다.] 이 당시의 역사가 어떠한지는 구전이나 설화, 전설이나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다. 다만 구전자료들을 기록한 문헌들에 의하면 최소 11세기 경부터 어떤일이 있었는지는 대충은 유추해볼수있는 수준이다며 지금의 페루 일대에서 건국된 [[잉카 제국]]이 에콰도르 일대를 정복하기 이전에는 8개의 왕국이 존재했으며 그 중에 키토 왕국이 가장 힘이 세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이들 국가는 1460년에 잉카 제국에 정복되어 갔고[* 잉카 제국의 지배에서 독립하려는 반란들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에콰도르는 잉카 제국에 빠른 속도로 동화되어 갔다.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에콰도르는 잉카 제국 최후의 수도가 위치해 있었을 정도로 잉카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였으나, 결국 1572년에 잉카 제국이 멸망하면서 에콰도르도 스페인에 의해 정복되었고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100년 넘게 받는다. 물론 잉카 제국의 탄압을 받아 잉카에게 치를 떨던 카나리 족 등 일부 현지의 남미 원주민 부족들은 스페인군을 지지하여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거나 잉카 멸망 이후에 일어났던 잉카 잔당 세력들의 저항을 진압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여하튼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에콰도르와 [[페루]]는 지금도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1820년에 남미 전역이 독립열풍에 휩싸이면서 이 나라도 해방이 되면서 [[그란 콜롬비아]]의 구성원이 되었지만 정작 해방 이후에 내분이 생겼고 [[시몬 볼리바르]]가 사망하면서 구심점이 사라지는 바람에 각자 제갈길 가자는 식으로 [[베네수엘라]], [[콜롬비아]]와 함께 1830년에 분리 독립하였다. 독립 직후에는 플로레스 정권이 통치하고 있었으며 독립 당시에는 지금과 비교하면 상당히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내전과 주변국들인 콜롬비아, 페루와의 전쟁으로 인해 상당수 영토를 잃어버리면서 영토가 쪼그라들었다. 플로레스 정부는 키토의 과두지배층을 중심으로한 기득권 집단을 지지계층으로 두고 있었고 반동적인 통치를 펴왔다. 1845년에 전복되었지만 이후로도 혼란은 계속되었다.1972년 군부는 벨라스코 대통령과의 관계를 끊고 기예르모 로드리게스가 대통령이 되었으며 토지개혁을 약속하면서 석유개발도 본격화 되었다 하지만 정작 석유로 인한 수입은 늘어나면서도 [[토지개혁]]은 지지부진하였고 1976년에 물러나서 포베이다 해군 사령관을 의장으로 하는 최고위원회가 집권했고 결국 1979년에 민주화되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의 첫번째 민선 대통령인 하이메 롤도스가 1981년에 비행기 사고로 급사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불길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1982년 중남미 외채위기에 에콰도르도 휩쓸렸고 설상가상으로 엘니뇨까지 겹치며 에콰도르는 다시금 어려움에 빠졌고 결국에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야 되는 처지로 내몰렸으며 1986년부터 진행된 저유가와 1987년의 대지진, 연간 수십%가량의 高 인플레이션과 임금수준의 실질적인 침체 밎 삭감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최악의 시기를 보냈다. 1988년에 민주좌파당의 로드리고 보르하[* 그 유명한 [[보르자 가문]]의 후손이다.]가 당선되었지만 경제정책은 달라지지 않았고 시민들의 실망감은 더욱 깊어져갔다. 1990년대 초중반와서는 지속적인 경제위기에 어느정도 면역성이 생기면서 에콰도르의 경제가 지표상으로는 그런대로 안정세를 찾아가나 싶었지만 빈부격차는 심화되었다. 한편 1996년 대선에서 레바논 출신 아랍계 정치인 압달라 부카람이 당선되었지만 '''잦은 기행을 벌이는 통에'''[* 선거운동 기간 중에도 상대후보에게 쌍욕을 날리기로 유명했으며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 축구장이 없다는 이유로 대통령 관저 입주를 거부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임기초에는 일을 제대로 할것 같았는데 얼마가지 않아 공약따윈 내평겨치면서 '''재정적자를 줄이겠다고 공공요금을 3배로 올리는 기행 중의 기행을 저질렀고''' 자신의 친 동생을 장관으로 임명하기까지하는 기행도 선보여서 인기를 까먹고 취임 몇 달만에 탄핵당했다. 퇴임 이후에도 불법 총기 소지, 조직범죄 연루 혐의를 받았다.] 1997년 2월에 무능과 부패를 이유로 해임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1997년 외환위기가 닥쳐오기까지 하면서 경제와 정치적으로 혼란해져서 압달라 부카람을 포함해서 4명의 대통령이 중도에 사퇴하고 3명의 임시대통령이 그 자리를 대행하는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다.[* 라파엘 코레아 직전에 재임한 알프레도 팔라시오는 루시오 구티에레스가 공약불이행과 부패문제로 지지율이 급속히 떨어지는 마당에 대규모 시위까지 겹쳐서 결국에 중도 사퇴하자 대통령직 승계를 받고 잔여임기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임시대통령은 아니다. 다만 임기가 2년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임시대통령 비슷한 처지이기는 했다.] 2002년에 루시오 구티에레스가 당선되었지만 그 역시 공약을 내팽겨치고 부정부패로 원성을 사게 되면서 2005년에 탄핵되었고 이후로 알프레도 팔라시오가 대통령 직을 수행하다 2006년 대통령 선거로 [[반미]]와 정국 안정을 내세운 [[좌파]](라파엘 코레아[* 알프레도 팔라시오 정권당시에 재무장관을 재직하였지만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과의 마찰로 4개월만에 하차하였다. 그러나 이때 마찰을 빚은걸로 인해서 그동안 IMF와 세계은행에 질려있었던 여론의 지지를 받게되면서 결선투표에 진출하게 되었고, 마참 상대가 알바로 노보아였는데 재벌이라는 점이 부각되면서(한국으로 친다면 [[통일국민당]] 창당해서 대선에 나갔을때의 정주영 생각하면 된다.) 결국엔 집권하게 된 것.]) 정권이 집권했다.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은 외교적으로는 미국과의 [[FTA]] 협상 논의를 중단시키고 베네수엘라와 친하게 지내는 등 반미성향이긴 했었지만 젊었을 때 미주개발은행(IDB)의 지원하에서 교육 시스템 개선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했었고, '''미국에서 정통으로 경제학을 공부하여''' [[경제학]] [[박사]]학위를 따낸 경력이 있다. 다만 그가 유학한 일리노이대 경제학과 자체의 성향은 이른바 시카고 학파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하고는 거의 정반대의 스탠스를 지니고 있긴 하다. 그리고 경제학자 [[장하준]]과도 인연이 있다. 미국 유학 시절 장하준의 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고 특히 그의 저서인 [[사다리 걷어차기]]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 에피소드도 있을 정도이며 덕택에 의외로 경제정책을 봐도 한국의 영향을 상당히 받은편이다. 그러나 정작 한국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별로 못받는다. [* 마찬가지로 페루의 오얀타 오말라 전 대통령도 한국에서 근무한적이 있는데 재임기에는 한국 언론으로부터 자원외교 이슈를 제외하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라파엘 코레아는 임기를 수행하면서 딱히 빌릴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결국엔 빌린 부채가 있다는 이유로 디폴트 선언을 하면서 신용도가 상당히 하락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외채를 상당히 탕감받았기도 했고, 그 이외의 부채에 대해서 꼬박꼬박 갚다보니 2014년에 아예 국채를 다시 발행할 정도로 경제 수준이 회복되었다. 또한 빈민구제와 중산층 확대, 교육개혁, 고용의 질 개선과 실업률 하락, 인플레 억제, 원주민의 지위 향상, 사회간접시설 확충, 치안 향상 등에서 성과를 냈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고용의 질향상이나 교육개혁, 실업률 하락에서 성공을 거두웠지만, 정작 인플레 억제와 치안 향상에 실패한 차베스와는 다르긴 하다.] 많은 지지를 받지만 자신에게 비판적인 민영방송국을 경영진의 비리범죄를 이유로 압수하여 국유화시키고 언론을 상대로 대량의 소송을 벌이는 방식으로 압박을 가하거나 환경보존을 위해 개발을 유보했던 아마존 지역의 개발을 석유개발을 이유로 다시 실행하려하는 등 권위주의적인 면모도 같이 보여주기 때문에 비판받기도 한다. 여하튼 1기 집권시에 많은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 점으로 인해 야권층과 기득권층에서의 반발이 격렬히 표출되기도 하였다. 2010년 10월 1일, [[경찰]]들이 공무원 복지 혜택 축소법안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켰다. 일부 [[군인]]을 포함한 경찰 폭도들은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을 붙잡아 경찰병원에 12시간 이상 억류하고, 각종 관공서를 장악하는 등 거의 [[쿠데타]]에 가까운 혼란을 일으켰다. 대통령이 억류된 과정이 좀 웃긴데, 대통령이 자신들에게 연설하러 오자 [[최루탄]]을 쏘았고, 그게 대통령 옆에서 터져 치료를 위해 병원에 후송했는데, 하필이면 '''경찰병원'''으로 옮겨져 거기서 흥분한 경찰들에게 둘러싸였다. 결국 코레아 대통령을 구출하러 출동한 군대와 경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져 사망자 2명과 수많은 인명피해를 낸 끝에 대통령은 구출되었고, 군부대가 투입되어 경찰 병력을 제압하였다. 이후에는 잠잠해졌으며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의 3선 이후 에콰도르 내정은 안정되어 갔다. 특히 빈민층과 서민층, 일부 중산층을 중심으로 지지가 상당하다. 그 이유가 자신의 기반이 안정된 이후 내부 인프라 확장과 빈민구제에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인데, 도로를 신설ㆍ확장하고, 전화와 인터넷망 등을 확대하며, 치안도 강화했다. 덧붙여 빈민 구제로 중산층이 상당 부분 늘어났기도 했다.[* 실제로 2006년에 최저임금이 100달러선이었는데 2016년 기준으로 300달러 선까지 올라갔다. ] 부유층이 상당히 많아 코레아 대통령의 힘이 약한 과야킬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인 치안이 그나마 괜찮은 편. 여하튼 그 덕택인지 2016년 엑스파트 인사이더 보고서에서 외국인이 살기 좋은 나라 2위에 선정됐다. 다만 조사자체는 지진이 일어나기 이전에 했기 때문에 지금은 좀 달라질수도 있기는 하다. 2019년 10월 4일에 에콰도르는 유류 보조금 폐지로 인해 시위가 발생되었고 이틀째 혼란이 벌어지면서 230명이 연행되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001&aid=0011123075|#]] 그리고 극심한 정정혼란이 발생하고 있지만, 에콰도르 정부는 쿠데타 시도라고 주장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001&aid=0011130516|#]] 대통령은 퇴진 거부하고 있다.[[https://www.infobae.com/america/america-latina/2019/10/09/crisis-en-ecuador-lenin-moreno-aseguro-que-no-dimitira-bajo-ninguna-circunstancia-a-pesar-de-las-protestas/|#]] 또한, 원주민들도 시위에 참여하면서 시위대는 커지고 있고 모레노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001&aid=0011137964|#]]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수도 키토와 주변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군에 의한 통제를 명령했다고 한다.[[https://www.yna.co.kr/view/AKR20191013002251072?section=international/all|#]] 결국 [[레닌 모레노]] 정부는 시위대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일단락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32&aid=0002968312|#]] 2021년 2월 7일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001&aid=0012189896|#]] 1차 투표에선 코레아의 지지를 받은 안드레스 아라우스가 32.7%, 우파 후보인 기예르모 라소가 19.7%, 다른 좌파 후보인 야쿠 페레스 후보와 하비에르 에르바스 후보가 19.4%, 15.4%를 득표했다. 1차 투표에서는 좌파가 우세했으나 다른 좌파 후보들과 코레아의 관계가 매우 나쁜 게 변수였고, 결국 결선투표에서는 라소 후보가 승리하여 여야간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421&aid=0005283766|#]] 2022년 2월 17일에 에콰도르 국회는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의 경우 임신 초기 낙태를 가능하게 하는 법안을 찬성 75표 대 반대 41표, 기권 14표로 가결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001&aid=0012996240|#]] 2023년 5월 17일, 국회가 부패혐의로 대통령 탄핵을 추진하자 라소 대통령은 헌법 148조에 따라 스스로 자리에 물러나면서 국회해산을 단행하였다. 이를 동반사망이라고하는데 연내에 대선과 총선을 다시 치러 각각 뽑힌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나머지 잔여임기(2025년 5월)를 채운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3949031?sid=104|#]] 대선 앞두고 야당인 '건설 운동' 소속 [[페르난도 비야비센시오]] 후보가 괴한에게 피습 당하고 [[페르난도 비야비센시오 암살 사건|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https://m.yna.co.kr/view/AKR20230810145000704?section=international/all|#]]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