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엑스포 (문단 편집) == 역사 == 엑스포 초기의 시대상은 [[중세]] 유럽으로부터 내려오던 [[길드]]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지역적 폐쇄성이 사라지며[* [[1791년]]에는 "노동의 자유에 관한 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각 지역의 [[산업]] [[발전]] 정도가 눈에 띄게 차이가 나게 되면서 이러한 [[기술]]적 발전을 한 데 놓고 비교하는 자리가 필요해졌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1756년]]에 '영국산업박람회'가 열렸고, [[1798년]] 프랑스 정부가 최초의 국영 산업전시회인 '제1회 산업박람회'를 개최했다. 이것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려진 박람회의 시초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1849년]]까지 총 11회 정부의 공식 국영박람회가 개최됐고 이후 더 큰 규모로 박람회를 개최하려다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서 개최가 늦춰지자 [[영국]]이 선수 쳐서 [[수정궁|유리궁전]]을 짓고 개최한 국영 박람회인 [[1851 런던 엑스포]]를 실질적인 '''세계 박람회'''로서의 시초로 꼽는다. 이 때를 기점으로 자국의 선진 과학을 홍보하여 [[국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엑스포를 개최하게 되었다. 아래와 같은 현대문명의 이기들은 엑스포를 통해 세상에 처음 공개되었다.[* 사단법인 2030부산월드엑스포 범시민유치위원회 발췌, 수정 인용.] 기술의 발전과 피드백이 빠른 현대에는 산업 박람회를 통해 빈번하게 신기술이 공개되지만, 체제 경쟁이 심하던 20세기 중반까지도 등록 박람회가 신기술 소개의 장으로 기능했다. || 박람회 || 소개된 기술 || || 1851 런던 엑스포 || 크램튼의 [[증기 기관차]] 엔진 || || 1853 뉴욕 엑스포 || [[오티스]]의 [[엘리베이터]] || || 1876 필라델피아 엑스포 ||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전화기]], [[하인즈]]의 [[케첩|공산품 토마토케첩]][*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소비되는 하인즈(Heinz)사를 설립한 F. & J. 하인즈가 만든 시판용 케첩으로, 세계 최초의 시판용 케첩이자 미국 최초의 포장식품이기도 하다.] || || 1878 파리 엑스포 || 에디슨 전구 및 축음기 || || 1885 안트베르펜 엑스포 || 자동차 || || 1893 시카고 엑스포 || 브라우니 || || 1904 세인트루이스 엑스포 || [[라이트 형제|동력 비행기]], 아이스크림콘 || || 1939 뉴욕 엑스포 || TV, 나일론, 플라스틱, 녹음기 || || 1970 오사카 엑스포 || 무선전화기, IMAX || 의외로 시작이 초라했던 [[올림픽]]과 [[월드컵]]과는 달리 '''엑스포는 초창기부터 화려하게 시작'''했다. 애당초 올림픽이 엑스포에서 스포츠 분야를 분리해 시작하다 보니 초창기에는 마치 엑스포의 부속 행사 성격이 강했고, 그 때문에 초기의 올림픽은 엑스포와 같이 시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국박람회는 자국이 얼마나 발전했고 선진화됐는지 과시할 절호의 기회였고 각 나라의 과학적, 예술적, 문화적인 걸작들이 출품돼 한 자리에 모이는 세계 교류의 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국의 국가원수들이 직접 나서서 엑스포 개최를 도모했고정치 선전 도구로 이용되었다. 대표적으로 [[1937 파리 엑스포]]때는 독일[* 운수부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가 설계함.]과 소련은 자국의 파빌리온[* pavilion, 박람회나 전시장 등 특별한 목적을 위해 임시로 만든 건물.]을 서로 마주본 채로 상대방보다 높고 거대하게 만들려 했다.[* 소련은 특유의 선전 동상을 출입구 건물을 기단 삼아 올렸는데, 독일은 슈페어 특유의 고전주의 건축물을 동상보다도 높게 세우고 그 위에 국장인 독수리를 올려놓았다. [[https://twitter.com/eun_gong/status/834212953557643265|매우 활동적인 형태의 소련 동상과 그걸 내려다보는듯한 차가운 인상의 독수리가 인상적.]]]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arisIntExpo1937.jpg|width=100%]]}}}|| ||<:> {{{-1 1937 파리 엑스포의 모습. [[나치 독일]]과 [[소련]]의 체제 대결 구도가 극명히 드러난다.}}} || 위 사진에서 왼쪽이 독일이고 오른쪽이 소련이다. 독일과 소련은 호스트인 [[프랑스]] 국가관의 몇배나 되는 국가관을 짓고 자존심 경쟁을 벌였다.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은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1937 파리 엑스포]] 개막식에 참석하려 했지만 [[프랑스 제3공화국]] 측에서 히틀러의 참석을 견제하는 바람에 결국 방문 일정을 포기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조치에 빡친 히틀러는 '''[[1940년|3년 후]]에 [[프랑스 침공|프랑스를 멸망시켜서]] 기어이 [[파리(프랑스)|파리]] 땅을 밟는 데에 성공했다.'''] 국가관을 통해 서로 자신의 체제가 우월하다고 선전했고, '''그 끝은 [[1941년]] [[독소전쟁]]'''으로 터져버렸다. 1900 파리 엑스포 때는 '''무려 2천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했는데 당대 인구로 미뤄볼 때 엄청난 수준이다.[* 인구가 당시에 비해 훨씬 증가한 후 열린 [[2012 여수 엑스포]]의 관람객이 '''약 800만'''이다. 1900년 인구가 약 20억 명, 2012년 인구가 70.2억 명인 것과, 1900년에는 장기 여행을 할 수단이 느린 증기기관차와 정기 여객선밖에 없었음을 감안하면 단순한 산술적 수치인 2.5배를 넘어서는 엄청난 수치다. 물론 여수 엑스포가 워낙 부진한 성적으로 마지막 가서는 표를 할인하는 전략까지 내세워 겨우 목표치를 달성한 부진한 박람회였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2000만이라는 숫자가 당시 인구 기준으론 상당히 많은 인원이었긴 하지만 1937 파리 엑스포 3000만, 1939 뉴욕 엑스포 4500만, 1970 오사카 엑스포 6400만, 2010 상하이 엑스포 7300만, 2002 아이치 엑스포 2200만, 2015 밀라노 엑스포 2100만, 1993 대전 엑스포 1450만 등 대부분은 기본 천만 단위의 관람객을 찍었다.] 그리고 엑스포의 영향력은 막강해 와인 등급[* 프랑스 보르도 와인을 박람회에서 홍보할 목적으로 1855년에 그랑 크뤼 클라세(등급제)를 제정하게 됐다.]과 세계 도량형 기구가 엑스포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은 원래 시카고에서 개최하려 했으나 나중에 세인트루이스로 변경했는데 이유가 세인트루이스에 엑스포가 개최 중이라 거기에 모인 관람객들에 편승하려고(...).. 그러자 너도나도 엑스포를 개최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혼란[* [[올림픽]]은 참가자들의 비용을 주최 측에서 지원하지만 세계 박람회는 원칙적으로 각 참가국에서 알아서 비용을 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구잡이로 엑스포가 열리게 되면 [[계륵|돈이 들어서 참가하기는 싫은데, 그렇다고 체면상 참가하지 않을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을 수습하고자 파리에 [[국제박람회기구]](국제 박람회 사무국, BIE)가 설립되었고, 이에 의해 공인받은 엑스포만이 공식적인 국제행사로서의 '세계 박람회'가 되었다.[* 그 외의 경우는 아무리 '엑스포'나 '박람회'라는 명칭을 써도 그냥 지역 행사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을 예로 들자면 [[고성군(경상남도)|고성군]] [[공룡]] 엑스포 같은 경우.]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58 엑스포 소련 스푸트니크.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70 엑스포 미국 아폴로.jpg|width=100%]]}}}|| ||<-2><:>{{{-1 1958 브뤼셀 엑스포의 소련관(좌), 1970 오사카 엑스포의 미국관(우).[br]양국 우주 경쟁의 상징인 스푸트니크 2호와 아폴로 11호를 전시했다.}}}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개최된 엑스포도 [[냉전]] 시대의 체제 경쟁과 정치적 후폭풍을 몰고 다니긴 마찬가지였다. [[1967 몬트리올 엑스포]]에서는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이 방문해 '''"[[퀘벡 독립운동#s-2.1|자유 퀘벡 만세!(Vive le Québec... libre !)]]"'''라는 [[퀘벡]] [[분리독립]] 연설로 [[캐나다]]와 [[프랑스]]를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cacbd8386a59339bba17da545fb745e.jpg|width=100%]]}}}|| ||<:> {{{-1 1967 몬트리올 엑스포 당시 샤를 드 골의 발언을 보도하는 신문 기사.}}} || BIE가 설립되면서 엑스포의 명칭도 "등록 박람회"는 '''World's Fair'''로 정해졌다. Expo는 약칭으로 쓰는 것이다. 인정 박람회나 원예박람회는 Expo라는 단어만 쓸 수 있고 World's Fair를 못쓴다. 이 World's Fair라는 표현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이후인 [[1949년]], [[유엔|UN]] 산하 기구로 BIE가 편입되면서 UN의 '''세계 표준 [[상표권]]'''으로 등록되었다. 따라서 등록 박람회 World's Fair라는 표현을 다른 [[전시회]]에서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다. Expo에는 이런 조치를 하지 않아서 지역의 박람회를 "엑스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