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엘리사 (문단 편집) === 역성혁명 그 뒤 === 예후는 오므리 왕조를 척결하고 엘리사를 비롯한 예언자 집단의 지지를 받아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예후의 신앙은 과거 여로보암이 추진했던 금송아지 신앙의 회귀였고, 이는 엘리사의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그와는 별개로 예후의 집권은 불안정했는데, 마찬가지로 엘리사가 세운 아람 왕 하자엘이 여전히 세력을 확장하면서 시시각각 북이스라엘의 존망을 위협하고 있었고,[* 길르앗 라못에서 회군한 탓에 갓 지파, 르우벤 지파, 므낫세 지파의 땅인 아로엘과 길르앗, 바산 일대가 모조리 아람에게 넘어가 버렸다.] 남유다 역시 살아남은 아합 왕의 딸 아달리야가 여왕이 되면서 북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적대관계로 돌아서 버렸다. 결국 위아래로 고립되어 버린 예후는 시리아 북방의 강국인 아시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는데, 과거 아합과 벤하닷 2세가 공동전선을 펼쳐서 막아낸 적이 있던 아시리아 왕 살만누아사리두는 예후의 SOS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에 예후는 아시리아를 상국으로 섬기며 조공을 바치게 되었는데,[* 이 내용은 아시리아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으며 성서에서는 나와 있지 않은 사실이다. [[예후]] 항목 참조.] 이는 후일 북이스라엘과 아람 양국이 아시리아에게 먹히는 날을 앞당기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이리하여 예후의 북이스라엘과 아람은 또 다시 오랜 세월동안 전쟁 상태에 들어갔으며, 이는 예후 뿐만 아니라 예후의 아들인 여호아하스, 그리고 손자인 요아스(여호아스) 대까지 이르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