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몽전쟁/평가 (문단 편집) ==== 긍정적인 면 ==== 고려가 몽골에 국혼을 제안한 것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나마 몽골을 향해 자주적인 목소리'라도 내기 위한 방책이었다. 즉,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되길 선택한 궁극적인 이유는, 고려가 몽골의 제후국으로 전락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 이상 고려가 얻을 수 있는 국익을 최대한으로 얻어내고, 몽골의 내정간섭을 그나마 줄여보려는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된 것부터가, 특혜라면 엄청난 특혜였다. 못 믿겠지만 사실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일이지만, [[조선]] [[이방원|태종]] 때 "[[명나라]] 황제에게 [[공주]]가 있는데 조선의 세자와 결혼시키면 어떨까?"라는 얘기가 나왔을 때 하륜이 "올ㅋ 그거 좋은데? 고려 때도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특혜 누렸잖아" 라고 반응했다. 즉 부마국은 일반 국가와는 격이 다르다. 게다가 혼인으로 맺어진 소위 '장인과 사위 관계'니, '장인'인 몽골이 '사위'인 고려를 남들과 똑같이 대해주면 그건 그것대로 어색하다.] 몽골은 중국과는 달라서 [[황금씨족]]이 아니면 절대로 아무하고나 통혼하는 일이 없었다.[* 비단 몽골뿐 아니라서 유목민은 혈연에 많이 집착했다.] 그만큼 [[순혈주의]]에 집착했던 자들이었다. [[칭기즈 칸]]이 처음으로 혼인관계를 맺은 것은 옹기라드(Onggirad)와 이키레스였으며, 이후에 옹구드(Onggud), 오이라드 등도 있었다. 이들 부족들은 칭기스칸이 몽골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군사적 지원을 보냈고 스스로 몽골에 귀부(歸附)하였던 세력들이다. 그런데 고려는 어떠한가? 고려는 앞서 말했듯이 [[무신정권]]이 대대로 몽골을 상대로 온갖수법으로 전쟁을 질질 끌고 나갔던 나라다. 《[[고려사]]》에는 [[쿠빌라이 칸]]이 1260년에 고려 [[원종(고려)|원종]]에게 보낸 조서에 "현재 하늘 아래 아직도 우리에게 신하로 복종하지 않는 나라는 다만 너희 나라(고려)와 [[송나라]]뿐이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물론 이는 허세가 좀 들어간 말로, 하늘 아래 신하로 복종하지 않는 나라는 두 나라 말고도 더 많이 있어서 사실 과장된 표현이었다.] 그렇게 항복한다고 말만 해놓고 빨리 항복을 안 하고 개겼던 나라가 [[고려]]와 [[남송]]이었는데 남송은 결국 1279년에 군대를 풀어서 밟아버렸지만 고려는 부마국이 되는 특혜를 입은 것이다. 그러니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된 것은 오히려 특혜를 입은 것이지 손해를 입은 게 아니다. 이렇게 [[쿠빌라이 칸]]이 고려의 국혼을 받아준 것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이 원종의 지지 덕분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은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국혼이 이루어지면서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었고, 이것은 고려의 입지가 강화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우선 [[원종(고려)|원종]]부터 그 위상이 달라졌다. 원종이 쿠빌라이 칸의 [[사돈]]이 되었기에 몽골 입장에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그 기록이 역시 《[[고려사]]》에 나와 있다. > (1269년 11월) 계해일에 왕이 흑적(黑的) 등을 위해 잔치를 열면서 그들을 상좌에 앉히자 그들은 이렇게 사양했다. "지금 왕태자께서 이미 황제의 따님과 약혼하셨으니 국왕께서는 이제 황제의 부마 대왕(駙馬大王)의 부친이십니다. 그러니 황제의 신하인 우리가 어찌 국왕과 대등한 예우를 받겠습니까? 국왕께서 서쪽을 향해 앉으시면 우리는 북쪽으로 향하여 앉겠습니다. 국왕께서 남쪽을 향해 앉으시면 우리는 동쪽을 향해 앉겠습니다."(癸亥王宴黑的等使坐上座黑的等讓曰今王太子已許尙帝女我等帝之臣也王乃帝駙馬大王之父也何敢抗禮王西向我等北面王南面我等東面) >《[[고려사]]》 권 26 <세가> 26 -원종- 2 이렇게 고려 원종은 쿠빌라이 칸의 사돈이 되었기에 몽골 신료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지위로 격상되었다. 사위인 [[충렬왕]] 역시 마찬가지다. 《[[고려사]]》를 보면 1274년에 충렬왕이 즉위했을 때 몽골의 사신이 조서를 전달하였고 충렬왕이 술잔을 돌리자 사신은 충렬왕에게 절을 올리고 공손히 받아 마신 다음 다시 절을 올렸다. 그런데 같이 참석했던 [[다루가치]]는 꼿꼿하게 서서 마시고 충렬왕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사신이 다루가치를 꾸짖었다. > "왕께서는 천자의 [[부마]]이시거늘 어찌 늙은 놈이 감히 이런 짓을 하는 것이냐? 돌아가서 천자께 아뢰면 네놈이 무사할 줄 아느냐?" 다루가치는 본래 몽골에서 속국의 정치를 감독 및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들인데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의 부마가 되었기에 이제 더 이상 옛날 같은 위세를 과시하지 못하고 약화되었던 것이다.[* 다루가치는 몽골의 일개 관리에 지나지 않지만 고려의 왕은 몽골 대칸의 사위니까 다루가치 따위와는 격이 다르다.] 또 몽골은 국가의 대소사를 [[쿠릴타이]]란 회의를 통해 결정하는데 이 쿠릴타이엔 칸의 사위도 참석이 가능했다.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사위이기에 당연히 쿠릴타이에 참석할 자격이 주어졌으며 이를 통해 고려의 입장을 밝히고 국익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말한 다루가치 역시 충렬왕 이후로는 사라졌으며 지속적으로 요구해 오던 호구 조사 역시 몽골이 자진 철회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역적 [[최탄]] 등이 팔아먹었던 동녕부를 1290년에 반환받았고, 또 삼별초의 난으로 인해 상실하게 된 탐라총관부를 1301년에 반환받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1294년에 [[쿠빌라이 칸]]이 승하했을 때 [[고려인]]들은 예외로 장례식장에 참석할 수 있었다. 몽골의 장례 법도엔 오로지 [[몽골인]]만이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했지만 유일하게 [[고려인]]들만은 참석이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왕을 호종했던 신하들은 비록 가마꾼과 같은 천인이라도 빈전 출입을 금하지 않았다고 《[[고려사]]》에 다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충선왕]]은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몽골 황실 내에서도 상당히 서열이 높았다. [[원무종]] 보르지긴 카이샨이 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쿠빌라이 칸의 외손으로서 황실 내 상서열자 중 한 사람이었던 충선왕이 강력하게 지지해준 덕분이었다. 이에 무종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충선왕에게 [[심양왕]]의 작위를 부여해 고려 국왕이 만주 지역까지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해주었다. 이 모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되었기에 가능해진 일들이었다. 갖가지 문제점들은 있었지만 다루가치를 유명무실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폭넓은 자치를 보장받게 된 것, 만주 지역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게 된 것, 고려 역적들이 팔아먹은 땅을 일부라도 반환받게 된 것 등은 모두 고려 국왕이 몽골 칸의 사위가 되었기에 그 지위를 인정받아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