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우누이 (문단 편집) == 특징 == [[민담]]과 [[설화]]라는 것이 본래 으스스하고 섬뜩한 종류도 있는 것이지만, 이 설화는 그런 이야기들 중에서도 유독 [[공포]]스럽고 괴기스러운 축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한국 설화에서 횡액이나 초자연적 현상은 대놓고 [[금기]]를 어긴 것, 혹은 주인공의 명백한 도덕적 잘못에 대한 [[징벌]]의 의미가 강하게 드러나는데, 이 설화만은 예외적으로 '''갑자기 재앙이 찾아온다.''' [[금기]]와 관련이 없으므로 요괴를 퇴치하거나 물리칠 방법도 없으며, 그저 간신히 요괴로부터 몸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 가장 해피 엔딩에 가까운 판본이다. 이 점은 [[콩쥐팥쥐]], [[옹고집전]], [[흥부놀부]]로 대표되면서 [[권선징악]], [[인과응보]], [[개과천선]] 요소가 짙은 [[플롯]]을 가진 대다수의 한국의 설화와는 다른 점으로, 과거부터 [[지진]], [[화산]], [[태풍]] 및 섬나라의 특성상 자주 발생하던 풍랑에 의한 어부들의 실종 등의 [[자연재해]]와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시대]] 및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로 대표되는 [[전쟁]]처럼 개인이 통제 불가능한 인재(人災)가 많았던 연유로 인해 이유 없는 재앙을 소재로 한 민담이 많은 편이었던 [[일본]]의 설화와 유사한 플롯을 가진 특이한 설화라는 것이다.[* [[제주도]]의 날씨가 매우 변덕스럽고 제주도 자체도 화산섬이며 이로 인한 재난도 많았음을 감안하면 이러한 제주도의 상황 때문에 생겨난 설화일 수도 있다.] 즉, 교훈이나 시대의 규범 등과 무관하게, '''오직 원초적인 공포감만을 위한 이야기'''라는 점이 대단히 흥미로운 점. 굳이 억지로 찾아보자면 '아무 문제도 없던 화목한 부잣집에 금지옥엽 막내딸이 태어났는데, 알고 보니 요괴여서 집안이 망했다'는 내용에서 당대의 여성억압적인 뉘앙스가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막내딸은 '홀리는 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저 명백한 '''절대악'''에 가깝게 묘사되기 때문에, '집안에서 사랑받던 막내딸이 알고 보니 악마'라는 반전을 통한 공포감에 방점이 찍혀 있지, 여성에 대한 억압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여기서 막내딸이라는 요소는 아들보다 더 사랑받는 이미지에 가깝다. 비교하자면 [[오멘(영화)|오멘]]의 중세 한국 버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오멘에서 공포를 유발하는 소재가 마냥 선하고 순수할 것 같은 아기의 정체가 실은 [[악마]]였다는 것처럼, 이 이야기도 그러한 반전에서 오는 공포가 핵심. [[도시괴담]]이나 다른 [[괴담]]들이 오히려 시대의 규범, 억압 등을 반영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공포소설가 [[스티븐 킹]]이 분류한 공포의 종류 중 세 번째 부류로, '아무 이유도 없이 외부 세계에서 침입하는 이유 없는 사악함'에 해당한다. 그러나 재앙의 근원을 "아들들의 바른 보고를 무시한 대가"로 본다면, [[유교]] 세계관에서 흔히 있는 '간신배를 예뻐하다가 충신을 내쫓고 나라가 멸망한다'는 전형적인 충언 무시로 인한 재앙의 구조이다. 그렇게 본다면 사실 뒷산에 괴물이 나타나거나 외적이 나타나는 등 재앙의 발현 그 자체는 이유가 없는 설화가 많으므로 특별히 이유가 없는 재앙이 이 설화에만 있다고 본다거나, 희생자인 가장에게 잘못이 없다거나 하는 것은 좀 편향적인 해석이라 볼 수 있다. 판본을 막론하고 작중 등장하는 남매의 부모는 딸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특히 일부 판본에서는 ''''아들은 모두 죽어도 좋다.'''' 라는 극단적인 발언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금기를 범하는 부분이라 볼 수도 있다. '''한반도 전근대 사회에서 보통 가문의 대를 잇는 사람은 적장자였기 때문이다.''' [[신라]]는 [[한반도]]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성 군주가 통치했던 고대 왕조였지만, 1천년 신라의 역사 속에서도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고작 3명의 여왕이 즉위했다. 이것은 신라 특유의 강력한 [[골품제]] 때문인데, 성골이 있는 상태에서 진골이 즉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여자임에도 즉위했다. 진성여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즉위 시점에서 제1의 정통성을 가진 내물왕계 계승권자가 진성여왕과 [[효공왕]] 둘 밖에 없는 상태였다. 효공왕은 서자였기에 진성여왕이 먼저 즉위했고, 진성여왕이 퇴위하자 그제서야 효공왕이 즉위한다. [[고려시대]] 역시 비교적 가정 내 남녀의 권한이 비슷했던 것으로 보이나, 당장 창업군주 [[태조(고려)|왕건]]이 [[훈요 10조]]에서 '왕위 계승은 적자적손(嫡者嫡孫)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자격이 없을 때에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외손자가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었다는 것을 통해 [[고려]]의 여성인권이 [[조선]]보다 높았다고 보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지만, '''결국 딸은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야 더 말할 나위 없으니 설명을 생략하겠다. 즉, 부모의 행각은 ''''딸을 얻을 수만 있다면 가문의 대가 끊겨도 좋다.''''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는데, 고대, [[중세]]는 물론, 심지어 [[근대]]까지만 해도[* [[일제강점기]]의 일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조차 [[창씨개명]]에는 부정적으로 접근한 경우가 빈번했는데, 가문의 성과 부모가 준 이름을 멋대로 바꾸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팔아먹을 수 있었던 인간들조차 조상을 팔아먹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천인공노]]할 만행이자 [[패륜]]으로 해석될 만한 행위이다. 그렇기에 충분히 금기를 범했다고 볼 수 있는 행위인 것 또한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