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운형 (문단 편집) === 지도자로서의 평가 === ||<-30><:> {{{#005BA6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br]{{{-2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 ||<-5><:> 후보 ||<-5><:> 여운형 ||<-5><:> [[이승만]] ||<-5><:> [[김구]] ||<-5><:> [[박헌영]] ||<-5><:> [[이관술]] || ||<-5><:> 지지율 ||<-5><:> 33% ||<-5><:> 21% ||<-5><:> 18% ||<-5><:> 16% ||<-5><:> 12% || ||<-5><:> 후보 ||<-5><:> [[김일성]] ||<-5><:> [[최현배]] ||<-5><:> [[김규식]] ||<-5><:> [[서재필]] ||<-5><:> [[홍남표(1889)|홍남표]] || ||<-5><:> 지지율 ||<-5><:> 9% ||<-5><:> 7% ||<-5><:> 6% ||<-5><:> 5% ||<-5><:> 5% || ||<-30><:> {{{#005BA6 '''내각이 조직될 경우 적당한 인물'''[br]{{{-2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2호}}}}}} || ||<-6><:> [[대통령|{{{#000 대통령}}}]] ||<-6><:> [[내무부|{{{#000 내무부장}}}]] ||<-6><:> [[외무부|{{{#000 외무부장}}}]] ||<-6><:> [[재무부|{{{#000 재무부장}}}]] ||<-6><:> [[국방부|{{{#000 군무부장}}}]] || ||<-6><:> [[이승만]] ||<-6><:> [[김구]] ||<-6><:> 여운형 ||<-6><:> [[조만식]] ||<-6><:> [[김일성]] || ||<-6><:> [[법무부|{{{#000 사법부장}}}]] ||<-6><:> [[교육부|{{{#000 문교부장}}}]] ||<-6><:> [[상공부|{{{#000 경제부장}}}]] ||<-6><:> [[교통부|{{{#000 교통부장}}}]] ||<-6><:> [[노동부|{{{#000 노동부장}}}]] || ||<-6><:> [[허헌]] ||<-6><:> [[안재홍]] ||<-6><:> [[백남운]] ||<-6><:> [[최용달]] ||<-6><:> [[박헌영]] || ||<-30><:> {{{-2 * 위 표는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45~51에 실린 정치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자료(편집인 安峰守, 발행인 高麟燦)를 바탕으로 만들었다.[br]여론조사 제1호에서 백분율 합계가 100%를 넘는 이유는 복수 추천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http://botw.egloos.com/11227268|출처 및 참고자료]][br] }}}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틀:광복 직후 한국의 정치지도자, version=88)] >"통일 임시 정부의 수상 후보는 여운형이다." >---- >1946년 3월 소련 정보 보고서 >"미 국무성은 여운형을 당시 해방 이후 조선에서 인기 있고 유능한 지도자로 봤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중략)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그는 최대한 공산주의를 이용했을 뿐이며, 그는 민중정치기구 결성을 도왔지만,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고, 소련편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한국편이었다." >---- >리처드 로빈슨, 미군정 관리로 근무 >"이승만이나 김구는 너무 늙고 경륜도 영도력도 없는 망명객이므로 그들보다는 자유적이고 민중의 인기가 높은 여운형이 적합한 지도자이다." >---- >김용중(당시 재미조선사정협의회장), 1946년 초 >그러니까 그 당시에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건국준비위원회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어. 충천했어. 그 때 군정청에서 여론조사를 할 때도 몽양이 1등을 했다고. 그 당시 건국준비위원회의 인기라는 건 대단한거죠. >---- >이기형(시인), 2005년 KBS 다큐 > 김일성 동지는 여운형을 잘 모른다. 여운형은 대중선동을 좋아하는 야심가이고 철저한 친미주의자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다. 여운형이 좌우합작운동을 끄집어내면서 3대원칙을 제시했는데 첫 번째로 부르주아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 그는 출신 자체가 양반지주 출신이다. >---- > 1946년 여운형에 대한 박헌영의 발언[* 중앙일보 특별취재반에서 나온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실려 있다.] 개요에서 말했듯 그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엇갈리지만, 양심적 지도자이면서도 당대 정치 선동가로 꼽히긴 했어도 당시 상황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한다. 해방 직후 한국 정치 상황은 극단 세력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또한 무자비했기 때문에, 권모술수와 당략에 익숙해야 1인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그런 면에서 엄청난 재능과 무서운 추진력을 발휘했고, 당시 조선 사람들도 이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당시 설문 조사에 따라 가장 이상적인 내각을 구성한 것에 따르면, 대통령 이승만, 외무부 장관 여운형, 내무부 장관 김구, 노동부 장관 박헌영, 군사부 장관 김일성이었다. 목록을 보면 각 정치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 당시 설문 조사 대상은 38도선 이남 한정.] 그런데 그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남들과 타협하여 남들 말에 따라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고 해서 자신의 성향을 확실히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지독히 냉정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고, 이상주의자였던 김구 등과는 극한 대립을 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의 이상은 그저 자기 말이 옳으니 모두가 따를 거라고 생각한 어린애 같은 생각이라고 일축하는 비판도 있다. 김구는 이상주의자였지만, 그 실현을 위해 무장 투쟁을 한 반면, 그는 국내에서 언론 위주의 활동을 벌이며 일본 조선 모두에게 존중받은 독립 운동의 경험의 차이가 컸으리라. 실제로 김용기 장로[* 그는 여운형이 설립한 광동학교 학생이었고, 후에 가나안 농군 학교를 설립하여 농업 사회 발전에 공헌을 하여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는 그에게 "믿음을 확실히 하고(여운형은 기독교인이다) 정치를 그만 두든지, 정치를 하려면 좌든 우든 명확히 하라"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는 그 말을 듣지 않아서 죽음을 맞았다고 말하였다. 사실 여운형도 좌우 합작이 안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 스스로도 정치에 손 떼고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는데, 그게 생각대로 안 된다고 강원용 목사에게 털어놓은 적 있다. 게다가 여운형 성격이 애초에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적대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란 씨는, 그의 태도나 능력으로 볼 때 그는 대통령도 아니고 사회주의 지도자도 아니요, 요즘과 같은 부자 세상에서 스테이크 썰고 외국인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는 것에 적합한 사람이므로 태평성대나 이보단 못해도 국내 활동을 할 거면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척되어 극심한 갈등이 어느 정도 해소된 사회에서 태어났어야할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단번에 파악하는데 뛰어난 센스를 지녔고 상대방에게 자신이 원하는 사항을 단 하나도 숨김없이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그들을 수긍시키는 데에 남다른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외교관이 적합한 것 같다고 했다.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fs_010_0010_0050_0020|여운형과 로마넨코의 회담록]] 그는 사상을 뛰어넘어 중도적 실용의 좋은 모델로 평가받아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여운형 및 [[조봉암]], [[장건상]], [[조소앙]] 등은 진보 진영의 기원으로 점쳐지기도 한다. [[사회민주주의]]의 오래된 미래, 다재다능하며 소통을 중시하고 현실주의적 감각을 지닌 여운형이 위인이 될 것이라고 평가하는 중이다. 남한과 북한에서 동시에 존경받는 유일한 정치인이라는 말도 있는데, "남한에서는 색깔론[* 주로 [[뉴라이트(대한민국)|뉴라이트]] 계열에서 몽양 여운형을 [[빨갱이|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매도한다. 국정 교과서를 추진했던 교수 권희영은 몽양 여운형은 [[개소리|스탈린의 선택을 받아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며 몽양 여운형을 색깔론으로 몰기까지 했다.], 북한에서는 자기 사상에 끼워 맞추는 괴이쩍은 평가 기준"이 있어서... 이건 비단 여운형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인이 평가받을 때 겪을 수밖에 없는 한국 근대사의 비극이라 하겠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인민 본위의 정치를 옹호하였으나 권력을 잡지 못하였고, 좌우 양쪽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쑨원]]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중국어 논문 중에 여운형과 손중산을 비교 연구한 논문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