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방당 (문단 편집) == 행적 == 독립 전쟁의 영웅으로 미국민들의 강한 지지를 받던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3선에 도전하지 않기로 하면서 [[1796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연방당과 [[민주공화당(미국)|민주공화당]]의 대결이라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양당 구도가 되었다. 당시 연방당 내부에서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 아래서 두번 연속으로 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가 자연스럽게 다음 대선 후보로 출마하는 것으로 내정되어 있었고 실제로 출마하게 됐다. 결국 대선에서 [[존 애덤스]]가 53.4%, 선거인단 71명을 확보하면서 승리, 1797년 미국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당시 선거인단이 많이 배정된 미국 북동부 도시 지역이 연방주의자들의 정치적 본거지였기 때문. 그런데 아직 완전하게 정비되지 않았던 당시 미국의 선거 시스템 때문에 재밌는 일이 벌어진다. 당시 대선 시스템은 정당에서 대통령 - 부통령을 각각 따로 입후보해 개별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각 당에서 대통령, 부통령 후보를 내되 선거인단이 1인당 2표씩 하나의 명단으로 정리된 정, 부통령 후보들에게 투표해 1위가 대통령, 2위가 부통령이 되는 시스템이었다. 한마디로 선거인단의 배반 투표가 발생할 경우 서로 소속 정당이 다른 대통령 - 부통령이 나올 수 있었다는 소리인데 이게 현실이 되어버렸다. 연방당의 부통령 후보였던 핑크니가 연방당 몫의 선거인단이었던 71명 중 59명[* 배반표만 무려 12표였다는 말이다.]을 확보하는 데 그치면서, 선거인단 68명을 확보한 민주공화당 [[토마스 제퍼슨]] 후보가 2위를 차지, 존 애덤스 대통령 - 토마스 제퍼슨 부통령이라는 [[동거정부|체제]]가 되어버린 것. 어찌됐건 집권 여당이 된 애덤스와 연방당에게 당면한 과제는 [[프랑스]]와의 외교 갈등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 [[프랑스 혁명 전쟁|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현실화]]되자 프랑스는 제이 조약[* 1794년 미국 특사 '존 제이'에 의해 영국과 체결된 조약으로 독립 전쟁 이후 양국 경제 교류 복구 및 관계 개선 등을 약조한 협정이다. 즉, 미국이 다시 친영 노선으로 복귀한다는 신호라 미국 독립을 도운 프랑스는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당연히 반발했다. 참고로 당시 민주공화당은 친프랑스 노선을 취했다.]에 반발해 미국을 거진 영국의 반 속국으로 간주하고 있었고, 무단으로 미국 선박을 나포하거나 무역 행위를 방해하는 등 도발을 일삼았다. 이에 연방당은 혁명정부에 의해 양국의 외교 상황이 점차적으로 악화되자 크게 분노했고, 대통령에게 전쟁도 불사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존 애덤스는 대통령 취임 후 야당인 민주공화당의 눈치도 있어 전쟁 불개입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다. 실제로 이때문에 대통령인 애덤스와 해밀턴이 공개적으로 갈등하기도 했다. 하지만 존 애덤스가 재선에 실패하고 [[1801년]] [[토마스 제퍼슨]]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턴 급격하게 당세가 기울어 만년 야당 신세를 면치 못한다. 특히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 임기 중 터진 [[미영전쟁]] 당시 연방당이 친영국적 기류를 보인 탓에 미국인들에게 거의 반역 비슷하게 찍혀버리게 된것이 치명타였다.(...) 이후에는 민주공화당내 접점이 맞는 계파들과 협력하는 수준에 머물다가 1824년 [[민주공화당(미국)|민주공화당]]이 해산하던 해, 같이 해산하였고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흩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