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호/고구려 (문단 편집) == 개요 == [[고구려]]의 [[연호]]에 대해 서술하는 페이지.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1년 즉위하면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신뢰할 수 있는''' 기록으로 남은 한반도의 최초의 연호이다. 이후 고고학적 연구로 고구려가 연가(延嘉)나 건흥(建興) 등 자체적인 연호를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외에는 신빙성 있는 기록이 남지 않아, [[신라]]를 제외한 고구려나 [[백제]]에서 연호를 어떻게, 얼마나 사용했는지 전모를 밝히기는 무리이다.[* 백제는 발견된 금석문들이 죄다 연도를 갑자로만 표기했기 때문에, 백제가 국내에서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탓에 역사 기록에서 연호 대신 군주가 즉위한 지 햇수로 몇 년째인지 따져서 연도를 표기하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 물론 요즘 나오는 역사책에서는 서기를 함께 병기한다.] 고구려는 [[사료(역사)|사료]]가 부족한 만큼, 고구려의 연호로 추정하는 것들도 대부분 [[금석문]]에 남아있는 것들이다. 문헌 사료에는 연호는커녕 연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조차 전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연호 사용 사실을 기록해 준 [[발해]]와 [[신라]]와는 다른 특이한 점. 특히 발해의 연호는 중국이 그때그때 꼬박꼬박 기록해줬다. 그러다 발해 말기 일부 왕은 중국도 혼란기라 적어주지 못했다. 국가에서 사용했던 연호가 사서에 남아 있지 않은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오호십육국시대]]의 국가인 [[북량]]에서도 사서에서 확인되지 않는 자체적인 연호가 유물의 발견과 더불어 확인된 바 있다. 현존하는 14개의 북량석탑 중 6개의 예에서 기년이 확인되었는데 승양(承陽), 승현(承玄), 연화(緣和), 태연(太緣) 등이다. 승양을 제외한 승현, 연화, 태연은 중국 사서에서는 보이지 않는 연호이다.[* 양은경, 2005, <경4년신묘명 금동삼존불의 새로운 해석과 중국 불상과의 관계>, 《선사와 고대》 23-23, pp.43~4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