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호/일본 (문단 편집) === 혁명개원 === 일본에는 새 [[천황]]이 즉위할 때, 나라에 [[자연재해]]가 계속될 때 개원(연호변경)하는 관례가 있었다.[* 전근대 동양 왕조들은 그야말로 심심하면 연호를 갈아치우는 바람에 역사 공부하는 사람들이 연호를 외우느라 골이 부서질 정도다. 사실 중국의 복잡함에 비하겠냐마는, 중국은 1차 사료를 제외하면 서력기원 사용이 정착한 반면, 일본에서는 여전히 연호가 꽤나 널리 쓰이기 때문에 더 머리가 아프다.] [[신유]](辛酉)년과 [[갑자]](甲子)년에 개원하는 [[관례]]도 있었는데 이를 '혁명개원(革命改元)'이라 부른다. 두 해가 역학적으로 큰 변화의 때라 '[[역성혁명]]의 변화'가 일어날까 봐 미리 연호를 바꾸어 차단하겠다는 주술적인 의도였다.[* 연호를 바꾸는 것도 분명히 '큰 변화'이다. 따라서 (마치 압력밥솥에서 수증기를 빼듯) 변화의 때에 연호를 바꾸면 변화의 힘이 '정권 전복'이나 '[[역성혁명]]' 등으로 번지지 않으리라 여긴 것이다. 일종의 [[액땜]]인 셈.] 이 관습은 <역위(易緯)>[* [[주역]]을 풀이한 서적인데, 보통 기원전 1세기 말, [[전한]] [[애제(전한)|애제]] 시절 무렵에 집필되었다고 추정한다.]라는 중국 도참설 서적에 근거한 것이다. <역위>에는 "辛酉爲革命, 甲子爲革令"(신유년에는 혁명, 갑자년에는 혁령이 된다.) 하는 구절이 있다. 일본 [[조정]]은 혁명의 해를 앞두고 여러 학자들에게 연호를 무엇으로 바꾸면 좋을지 생각을 적어 올리라고 하였는데, 이때 학자들이 올린 글을 혁명감문(革命勘文) 또는 혁령감문(革令勘文)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감문'이란 '알아보고 조사해서(勘) 쓴 글(文)이란 뜻이다. 요새식으로 말하면 '조사보고서' 정도.] [[헤이안 시대]]의 학자 미요시 키요유키(三善清行, 847-918)가 주장하여 신유년이 되는 [[901년]]을 엔기(延喜) 원년으로 개원한 데서 혁명개원이 시작했다.[* 일본 사학계는 미요시 키요유키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실각시키려는 밑작업으로 [[중국]]의 신유혁명설을 명분 삼아 개원을 주장했다고 여긴다.] 원래 혁명과 혁령은 동의어지만, <역위>의 표현에 따라 신유혁명, 갑자혁령이라고 쓴다. 혁령보단 혁명이 더 대중적인 단어이므로 '갑자혁명'이라고 쓰는 경우도 왕왕 있지만 '신유혁령'이라고 쓰는 경우는 없다.[* '갑자혁령'이란 용어는 중국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한국의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실렸다. [[일본서기]]에서 [[진무 덴노]]가 처음 건국했다는 기원전 660년도 신유년이므로 학자들은 일본서기의 저자들이 신유혁명설에 따라 진무의 건국년을 맞추었다고 본다.] 신유년으로부터 3년 뒤면 갑자년이다. 따라서 혁명개원 [[관습]]을 철저히 지킨다면, 신유년에 개원하여도 연호를 최대 3년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또 바꿔야 한다. 혁명개원이 처음 실시된 이후 개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신유년 중에는 1561년, 1621년, 갑자년 중에서는 1564년이었다. 이중 1561년, 1564년에는 당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개원에 소극적이었기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1564년에는 [[미요시 나가요시]]가 가신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통하여 개원을 조정에 요청하였으나, 조정은 그것이 요시테루의 권위를 해칠까 염려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관습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세일원제[* 군주가 즉위하여 처음 연호를 정하면 중간에 바꾸지 않고 새 군주가 새 연호를 정하기 전까지 사용하는 것. 중국에서 일세일원제는 [[1368년]] 명태조 [[주원장]]이 홍무(洪武) 연호를 사용하면서 확립되었다.]가 확립되어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