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열하사변 (문단 편집) ==== 일본의 2차 화북공세(1933.5.7~1933.5.22) ==== 장제스는 일본군이 일단 철수했으나 재차 공격할 것을 의심치 않고 허잉친에게 추가적으로 지령하고 경계를 촉구했다. >"평화공작이 성취되든 안 됟든 관계없이 우리 군은 적극적으로 방위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 이는 우리 민족 최후의 일전이다. 불행히 패하는 일이 있더라도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더 이상 적이 깊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저지할 수만 있으면 된다. 범위를 넓히면 넓힐수록 배비도 점점 곤란하게 된다. 또 병력이 많아지면 지휘도 어렵게 되며 결국은 수렁에 빠져서 발을 빼지 못하여 붕괴하게 될 것이다. 성내에 식량, 탄약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허잉친은 27일 다음과 같이 답장했다. >"26일, 고급장령들과 밀담했는데 전원이 군인은 그저 명령에 복종할 뿐이라며 정전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중앙 및 군사위원회 베이핑분회의 명령에 따를 것임을 표명했음. 베이핑, 톈진을 대일 장기 저항의 근거지로 만들되 당면한 방책으로는 1. 베이핑, 톈진 방면의 군사배치를 극력강화한다, 2.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적의 진격을 늦추고 그 사이에 우리 쪽의 준비를 진행한다는 두 가지로 결정했음." 이 때 일본군은 장성 이남에서만 철수했을 뿐 중국군이 장악한 장성에서는 여전히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베이핑의 북동쪽 관문인 남천문에서는 황걸이 지휘하는 2사단이 22일 이래로 진지를 사수하고 있었고 여기에 일전에 2사단과 교대했던 25사단과 83사단이 추가로 투입되어 일본군에 맞섰다. 화력이 부족했던 중국군은 짚신을 신고 방한구도 없이 일본군의 항공기와 중화기에 처절하게 맞서 싸웠다. 근처가 온통 돌산이라 엄폐할 곳도 찾기 어려웠던 중국군은 철봉으로 구멍을 뚫어 폭격을 피하고 일본군 보병이 접근하면 매복공격하는 식으로 일본군의 공격에 맞섰다. 고북구 남쪽 40킬로미터 지점인 흥륭현에서는 중국군이 장성 넘어 반격하여 일본군을 포위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군정부장 진의에게 정전할 의사가 있다고 알려왔다. 상하이 주재 무관 네모토는 4월 27일 진의에게 중국이 흥륭현의 포위망을 풀어준다면 일본군은 남천문에서 철수할 것이며 중국군이 영평-옥전-순의 선까지 물러나준다면 정전할 용의가 있다고 전했다. 허잉친은 29일 진의에게 일본군의 요구를 수락하겠다고 알렸고 남천문의 중국군을 철수시키고 흥륭현의 포위도 풀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이타가키와 베이핑 주재무관 나가쓰는 정전에 반대하였다. 이타가키는 지금이야말로 중국의 반중앙운동을 자극할 시간이며 중국을 내버려두면 곧 항일정책을 할 것이라 주장했고 나가쓰는 1개 사단을 투입해 베이핑과 텐진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관동부 참모부 작전과 등이 호응하여 결전을 주장했고 정보과를 뜰어들여 다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5월 3일 국민정부는 행정원 베이핑 정무정리위원회를 설치하고 일본에 인맥이 많던 황부를 위원장에 임명해 정전교섭 준비를 갖추었다. 이때 관동군 참모장 [[고이소 구니아키]]가 다롄으로 돌아와 관동군 사령관 무토에게 결전을 해야 한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육군 중앙도 관동군의 행패를 전황상 필요한 일시작전이라고 옹호하고 있었고 결국 이러한 분위기에 고무된 관동군은 5월 7일 난동 방면에서 관내작전을 다시 발효하여 6사단을 선봉으로 산해관에서 무령으로 침공해들어왔다. 이날 호남 독군을 지냈던 [[장징야오]]가 베이핑의 한 호텔 욕실에서 암살되었다.[* 범행 주체를 두고 단순한 애국청년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고 국민당 밀정의 소행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가 가지고 있던 비밀문서를 통해 일본군이 화북에 괴뢰정권을 세우려 했음이 드러났다. 일본군은 11일 밤부터 12일에 걸쳐 난하를 도하해 14일 란저우를 점령했고 고북구 쪽에서는 8사단이 공세를 취해 12일 신개령을 돌파, 밀운 동쪽 30킬로미터 지점의 석갑진을 점령했다. 단 며칠동안 중국군은 3천명을 잃었다. 황부는 정전교섭에 희망을 걸고 네모토와 접촉했다. 네모토는 관동군의 지시에 따라 '일본군이 베이핑, 텐진까지 진격할 의도는 없으나 중국군이 일본군 수비구역에 포탄이 미치지 않는 선까지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황부는 장제스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왜군은 촌을 얻으면 척을 나아간다. 우리가 가까운 길을 택하려 하면, 해결은 도리어 늦어진다. 일본에게 성의있는 보장이 없는 한 결코 가볍게 양보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관내침공은 일본의 기정방침이며, 그 방침은 근본적으로 결코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허잉친도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 총참의 웅빈을 나가쓰에게 파견하여 중국군을 노대-보지 선으로 후퇴시키라는 일본의 조건을 받아들였는데 나가쓰는 중국 측의 양보에 오히려 더욱 흥분하여 중국군이 나약하니 지금이야말로 공격할 절호의 기회라고 공세를 부추겼다. 결국 탕산, 밀운, 삼하, 계현이 잇달아 함락되어 일본군은 베이핑에서 불과 5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진출했다. 여기에 이타가키의 특무기관이 [[스여우싼]]의 부하들을 선동하여 18일 란저우에서 독립을 선포하게 했고 일본이 매수한 깡패들이 텐진의 일본 조계의 해광사에 폭탄을 던지고 베이핑 일본 해군무관실의 국화 문양을 파괴하게 했다. 거기에 20일에는 중국 청년이 베이핑 일본공사관 위병을 칼로 찔렀고 톈진의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신축조약의 방위출동을 명분삼아 보병과 포병 600명을 베이핑 성내로 진입시켰다. 5월 22일 신하촌, 마구교에서 만복린과 왕이철이 잇달아 패했고 쑹저위안은 우익이 텅 비어 방어하기 불가능해졌다. 한편 히로히토는 관동군의 독자행동에 대해 사후재가를 해주긴 했으나 상당한 노여움을 표했다. 이는 관동군이 자신의 통수권을 우습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신임 시종무관장 [[혼조 시게루]]는 설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