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열하사변 (문단 편집) ==== [[이시모토 사건]]과 중일의 군사적 충돌 ==== 1932년 7월, 관동군 촉탁 이시모토가 게릴라 부대에 납치되는 [[이시모토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출병하여 중국군과 대치, 중국군의 사죄를 요구했다. 장제스는 강경대응을 지시하였으나 [[장쉐량]]과 열하성장 [[탕위린]]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시모토 사건은 아직 만주의 치안을 정리하지 못했던 관동군이 물러남에 따라 일단락되었고 장제스는 일본군이 열하를 공격할 여유가 없다고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1932년 12월 3일 장쉐량은 일본 측의 심상치 않은 동정에 대한 상세한 전보를 국민정부에 타전했다. ||난징 [[장제스|장 위원장]] 앞. 첩보에 의하면 일본은 만몽정책을 서두르기 위해 연일 중국어에 숙달된 다수의 일본인을 중국인과 함께 각 왕기에 은밀히 잠입시켜 비밀공작을 하고 있음. 장래 열하에 침공할 때 호응시키기 위함임. 고륜의 백 라마와도 이미 접촉이 있으며 그는 심양으로 사람을 파견했음. 근일 전해오는 소식에 의하면 일본은 열하의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에 침공 개시를 늦추고 있으나 현재 요령 병공창과 본국의 각 공장에서는 적재량이 많은 자동차 5천대를 서둘러 제조중이라고 함. 그 한대에는 군인 50명 외에도 기관총 2문, 신식 75mm구경 포 1문을 탑재한다 함. 총탄을 막기 위해 주위에는 철판을 쌓았는데 이는 모두 열하 침공을 위한 준비라 함. 11월 19일, 일본군은 금주역에 보급용 차량 10여대, 백미를 만재한 대형차 15대, 그리고 풀로 뒤덮은 적재물 불명의 차량 10여대를 수송, 일본 군단부에 운반해갔음. 또 금주의 일본군 헌병 사령부에 출동한 비민, 조경운, 이맹춘 등 두 사람은 열하 공격의 지휘자 역을 떠맡고 석산참, 대릉하 주변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있음. 기병 25원, 보병 15원의 조건으로 6개 여를 편성하여 일본군 3개 여단과 함께 열하에 침략하려고 생각하고 있음. 이것은 정확한 정보임.|| 이에 장제스는 12월 23일에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다. >"왜구의 열하 침공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다. 아마도 3개월 이내에 쳐들어올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일본군이 하북으로 진출한 다음 [[선통제|푸이]]을 업고 들어오든가, 혹은 또 다른 매국노를 괴뢰로 내세워서 '화북독립'을 외치고, 우리 중국을 분열시켜 통일을 불능케 하고, 모든 것을 왜구의 지배하에 둘 것임에 틀림없다. 그 광망한 탐욕은 [[득롱망촉]]보다 더해서 중국 전토를 정복하지 않고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의화단 사건 이래로 철도보호를 명목으로 산해관, 진황도 등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산해관에 일본군 100명과 소규모 공병부대가 주둔하여 4개의 포대를 갖추고 있었고 진황도에서도 50명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중국 측에서는 하주국 휘하의 장쉐량 직속 9여가 산해관 수비를 맡고 있었는데 일본군에게 금주를 빼앗긴 이후 중국군도 산해관 방비를 중히 여겨 임수, 임영경비사령부를 발족하여 하주국을 사령관에 임명하여 하북의 방비를 다지고 있었다. 이에 일본군은 야간 실탄사격 연습 및 중국 촌락 습격 등의 도발 행위를 벌이며 무력 행사의 구실을 찾고자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