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열하사변 (문단 편집) ==== 산해관 전투 ==== 1932년 10월 1일 오후 5시, 만주국 경찰 10여명이 거수자 체포를 구실로 산해관 동라성에 몰려들었다. 중국군은 문을 닫고 이들을 저지했으나 별동대 10명이 남문으로 난입해 동라문을 열고 동라성 문루를 점령하고 천하제일관을 장악하기 위해 중국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에 만주국 경찰 1명과 중국군 수비대 1명이 각 전사했으며 일본군 산해관 수비대장 오치아이 소위와 하주국 사령관이 교섭하여 쌍방의 오해였던 것으로 마무리하고 사망자에 대한 보상금을 지불한 다음에 종결되었다. 하지만 12월 8일 밤 10시, 관동군 8사단 장갑열차가 산해관에 들이닥쳐 9여 사령부를 향해 4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장갑열차는 계속 남진하여 관내까지 밀어닥쳤고 석하 철교에서 산해관 성내를 향해 10발을 추가로 발사했다. 중국군이 오치아이 소위에게 항의하여 장갑열차는 9일 새벽 2시에 발포를 중지하고 철수했으나 동이 트자마자 다시 다수의 일본인이 무장하고 진황도 세관에서 중국군 위병을 구타하고 물건을 약탈했다. 중국군은 일본군의 개입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무력을 쓰지 않고 이 사건을 무마하려 했고 외교부장 뤄원간은 12월 11일 일본 외상 우치다에게 항의하였다. 우치다는 문제의 장갑열차가 석탄과 물의 보급을 위해 산해관으로 가고 있었는데 중국군이 먼저 공격하여 응사한 것이라고 대답하여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1933년 1월 1일 정오, 오치아이 소위는 임영경비사령부를 방문하여 신년인사를 하였는데 사령관인 하주국이 베이핑 군사위원회 분회에 참석한 상태라는 것을 확인한 오치아이는 즉각 도발에 들어갔고 1월 1일 심야에 결정적인 충돌이 발생하였다. 산해관 남쪽 일본 헌병 분견대 및 일본군 수비대 주역 파출소 부근의 철도노선에서 수류탄 두발이 폭발했다. 그리고 산해관 남문 중국군 경계초소에 10여발의 총탄이 발사되었다. 이는 일본군 오치아이 소위가 시행한 자작극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군은 재빨리 성안으로 철수하여 성문을 폐쇄하고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남문 관외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 장갑열차와 일본군 병력은 즉각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중국군은 비서를 파견해 일본군 헌병대에 공격한 이유에 대해 항의했으나 일본군은 중국군이 먼저 공격했다고 오리발을 내밀었고 2일 새벽 1시 4개 항목을 요구해왔다. ||1. 남관 일대의 경계를 일본군에게 맡긴다. 2. 남관 일대의 중국군은 성내로 철수한다. 3. 남관 일대의 중국 경찰 및 공안대도 전부 또는 일부가 성내로 철수한다. 4. 남문 및 산해관 성벽 위의 중국군대는 철수한다.|| 황당한 요구였지만 일본군이 거부를 구실로 공격할 것을 우려한 중국군 임수사령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본에게 만약 해결할 성의가 있다면 우리는 요구조건 중 일부를 승인할 것이다.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동안, 야간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남관의 일본인 거주구역의 경계는 잠시 일본군에게 맡겨도 좋다. 남관 일대의 중국 병사도 잠시 성내로 철수한다. 그러나 남문 성벽 위의 초병에 대해서는 참모를 파견하여, 일본군이 발포만 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발포하지 않도록 감시시킨다. 어쨌든 날이 밝는 것을 기다렸다가 진상을 밝힌 다음 다시 교섭하도록 하자.|| 새벽 3시, 일본군은 남문 및 산해관 성벽 위의 중국병사가 철수하라는 요구를 수정, 남문을 개방하고 문과 성벽 위의 경계를 일본군에게 맡길 것을 요구해왔고 진상 조사 따위는 할 필요 없으니 요구를 승인하지 않으면 즉각 공격하여 무력으로 남문을 탈취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중국 측은 화답을 거절했다. 이 시각 일본군 장갑열차가 속속 도착함에 따라 일본군 병력은 보병과 포병을 합쳐 2천명 이상으로 증강되었다. 일본군은 오안성과 만수산 일대 고지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이리점, 오가령 일대에 보병과 기병을 진출시켰다. 그리고 오전 9시부터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30명의 일본군이 남쪽 성벽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하자 중국군이 응사하여 3명을 죽이거나 부상입혔다. 일본군은 이것을 중국군의 선제공격으로 규정하고 주중공사 아리요시를 통해 중국군이 남문을 일본군에게 넘겨주기로 약속해놓고 남문을 인수하러 온 일본군을 공격했다고 얼토당토않은 거짓말로 항의했다. 오전 10시, 석하철교에서 일본군 포 30여문이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8대의 비행기가 성내를 폭격하여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했다. 하지만 중국군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일본군을 잇달아 격퇴했다. 3일 오전 10시 증원군을 얻은 일본군이 남문과 성벽 동남쪽을 중심으로 맹공을 퍼부었다. 비행기 10여대가 100여발의 폭탄을 투하했고 전차와 공병대가 투입되어 성문과 성벽을 폭파시키려 했다. 그리고 진황도에서 대기하던 히라도 등 일본군 함선 2척도 포격을 가함으로 산해관은 일본군 육해공의 맹공에 휩싸였다. 결국 정오에 남문이 돌파되었고 그곳의 중국군 수비대는 전멸하였다. 중국군은 남문으로 진입하는 일본군을 1차례 격퇴했으나 결국 일본군의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성루가 모두 파괴되었고 수비대 거의 전원이 전사했다. 이어 서문과 북문이 잇달아 함락되고 성내로 일본군이 몰려들자 중국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3시 반에 중국군은 산해관을 포기하고 석하를 건너 철수했다. 일본군은 석하를 건너 남맹점과 오리대를 공격했으나 이는 중국군에게 격퇴되었다. 이 싸움으로 중국군 600명과 일본군 300명이 전사, 부상당했다. 장쉐량은 이 소식에 경악하여 "야만적이고 잔인한 국가를 뒤로하고 후퇴해야만 하는가?"라고 외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