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염민 (문단 편집) == 생애 == [[311년]]에 [[석륵]]이 진우를 점령했을 때 염민을 얻었는데 6촌동생인 [[석호(후조)|석호]]에게 양손으로 삼게 했다. 이로 인해 염민은 성을 고쳐 '''석민'''(石閔)이 되었다. 석민은 용맹하고 책략에 뛰어나 석호의 총애를 받았다. 후조가 성립된 후 무장으로 각지에서 활약했으며 [[338년]], [[전연]](前燕) 정벌에서 크게 패배했을 때 석민의 부대만 온전하게 퇴각하여 높이 평가받았다. [[349년]], 관중에서 일어난 동궁 수비군 100,000명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석민을 비롯한 제장이 출진해 있는 동안 태조 무황제 [[석호(후조)|석호]]가 붕어했다.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 중이던 석민 등은 하내 지역에서 [[석준]](石遵)과 조우하여 제위를 찬탈할 것을 권했다. 이에 석준은 반정이 성공하면 석민을 태자로 삼겠다고 약속하고 반정을 일으켜 [[석세]]를 폐위했다. 그러나 석준은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다른 이를 황태자로 삼았다. 하지만 석민은 아무 반항이나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신제 석준의 휘하에서 큰 전공을 세워 강력한 세력을 확립했다. 이에 석민이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석준은 이러한 석민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했다. 그러나 [[석감(후조)|석감]](石鑒)이 모의 사실을 석민에게 밀고하여 석민은 석준을 폐위하고 석감을 황제로 옹립했다. 석민은 후조의 실권을 모두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았다. 이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석민은 수도 업 인근만 유지했다. 옛 수도 양국에서는 [[석지]](石祗)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석민은 이를 정벌하기 위해 출진하려 했다. 이때 황제 석감이 석민을 [[암살]]하려고 했다가 실패하여 연금되었으며 분노한 석민은 갈족(羯族)을 비롯한 여러 호족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대량 [[학살]]을 단행했다. 특히 갈족은 태조 무제 석호의 자손을 비롯해 남녀노소 200,000명이 죽어 시체가 산더미를 이뤘으며 개중에는 외모가 갈족과 비슷하여 억울하게 죽은 이들도 있었다. [[350년]] 정월, 석민은 국호를 위(魏)로 바꾸고, 성씨도 이(李)로 고쳤으며, 윤정월에는 마침내 연금된 석감을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위(大魏)로 정했으며 원래 성씨인 염씨(冉氏)로 바꾸었다. 양국에서는 석지가 후조의 황제로 즉위했으며, 이후 염민과 석지는 치열한 혼전을 거듭했다. 이로 인해 화북 각지는 군웅할거 상태가 되었으며, 선비 모용부의 전연과 한족의 [[동진]]이 침입해 오고, [[저족]](氐族)의 [[부홍]](苻洪)이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前秦)을 건국했다. 350년 말에 염민은 후조의 수도 양국을 포위했다. 하지만 [[351년]]에 전연과 [[강족]](羌族)의 [[요익중]](姚弋仲)이 원군을 파견하여 염민은 크게 패배했다. 석지는 반격에 나서 업성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했으며 염민은 석지의 부하 유현(劉顯)을 매수하여 석지를 암살하고, 후조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 유현이 양국을 점거하고 염민에 적대했으며 [[352년]]에 이르러서야 양국을 함락할 수 있었다. 양국을 함락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염민의 군대는 크게 약화되었고 보급이 부족하여 양국 인근에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전전했다. 이를 틈타 전연은 명재상이자 명장이었던 [[모용각]](慕容恪)을 파견하여 염민을 공격했으며 염민은 크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동북방의 용성으로 호송된 염민은 [[참수]]당했고, 전연의 제2대 열조 경소제 [[모용준]](慕容俊)은 염민에게 '무도천왕'(武悼天王)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반면 염민의 후손들은 시호를 '평제'(平帝)로 추존했는데,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1년]]에 중국 [[허난 성]] 옌스 시(偃師市)에서 염민의 후손 염화의 묘비인 <염화묘지>(染華墓誌)[* [[https://zh.wikipedia.org/zh-cn/%E6%9F%93%E5%8D%8E%E5%A2%93%E5%BF%97|중국어 위키백과 참고]].]가 발견되어 염민의 시호가 전해지게 되었다. 염민은 이전에 후조를 멸하고 갈족에게 성적으로 학대받고 있었던 한족 소녀 50,000여 명을 구했는데, 이들은 양국에 머물러 있었지만 염위가 패망할 때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전연군에게 모두 포로가 되어 버렸다. 이들은 다시 전연 선비족들의 [[성노예]]가 되어 버렸다. 염민이 처형되자 태자 염지(冉智)가 업성에서 농성했다. 염지는 [[동진]](東晉)에 구원군을 청하기 위해 유명한 '''[[전국옥새]]'''를 동진에 보냈지만 구원군은 제때 오지 않았고, 곧 부하의 배반으로 업성이 함락되자 포로가 되었다. 염지마저 [[354년]]에 처형당하면서 염위는 완전히 멸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