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국/역사 (문단 편집) == [[중세]] 시대 == [include(틀:5세기 중반 브리튼 제도의 민족 분포)] [[브리튼인]]들은 로마군이 떠난 뒤로 스코틀랜드, 웨일스, 콘월 방면에서 계속 [[픽트족]], 스코트족의 침략을 받았다. 브리튼인만으로 버티는 것이 힘들어지자 유럽 본토에서 대규모로 [[앵글로색슨족]] 용병이나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게르만족]]이 잉글랜드로 들어왔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7px-Anglo.Saxon.migration.5th.cen.jpg]] 그러나 브리튼인과 앵글로색슨은 땅을 두고 전쟁을 벌였고 잠시나마 브리튼인이 앵글로색슨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나[* 이때 활약한 것이 [[아서 왕]] 등이다.] 결국 바다를 건너 계속 들어오는 앵글로색슨족을 견디다 못한 브리튼인들이 복속되어 7세기경까지 잉글랜드의 지배층은 게르만족이 되었다. 브리튼인 일부는 [[웨일즈]], [[콘월]] 지방으로 대피하였고 대륙으로 건너가 [[브르타뉴]] 공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앵글로색슨 국가들 사이의 전쟁 끝에 [[칠왕국]]이 나타났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82px-England_878.svg.png]] 878년 데인족과 [[웨식스]]의 영토. 요크와 케임브리지 사이의 옅은 색으로 표시된 땅은 험버 강 하구 습지(The Humber Estuary)와 펜스 습지(The Fens)다.[* 이 습지들은 오늘날에는 대부분 개간되었다.] 이렇게 브리튼족을 웨일즈, 스코틀랜드로 쫒아내고 잉글랜드를 차지한 앵글로색슨족은 8~9세기에 [[바이킹]]들의 침략, 이른바 '''[[이교도 대군세]]'''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칠왕국 대부분이 바이킹에게 정복 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앵글로색슨족은 과거 브리튼족과 달리 역사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버텨내는 데 성공한다. 칠왕국 중 유일하게 건재했던 [[웨식스]]의 국왕 [[알프레드 대왕]]이 가열찬 바이킹의 군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여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간신히 영토를 지켰다. 그러다 마침내, 10세기 초에 웨섹스의 국왕 [[애설스탠]]이 아직도 잉글랜드에 남아있던 바이킹 세력을 싹 몰아내고 칠왕국을 통일해 합쳐진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에드거 1세]]에 이르러서는 통일이 확고해졌다. 그러나 11세기에 '''또 다시''' 바이킹 군세가 몰려와 [[덴마크]]의 왕자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를 정복,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잉글랜드에 이르는 강력한 북해제국을 건설한다. 하지만 크누트의 북해제국은 확고하게 융합되지는 못한 채 크누트 사후엔 흐지부지 분열되었고 잉글랜드 역시 [[참회왕 에드워드]]의 등극으로 다시 앵글로색슨족의 웨식스 왕국이 들어섰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28px-Williams_dominions_1087.jpg]] 1087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가 지배한 영토 후에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할 준비를 한다. 문제는 풍향 때문에 윌리엄의 상륙이 지연됐고 침공에 대비하고 있던 잉글랜드의 왕 [[해럴드 2세|해럴드 고드윈슨]]은 수확기가 다가오자 징집병들을 해산시켰는데, 운이 나쁘게도 해럴드의 동생 토스티그의 사주를 받은 마지막 바이킹 군주 [[하랄 3세 하르드라다|하랄 하르드라다]]가 잉글랜드를 침공해왔다. 해럴드는 부랴부랴 병력을 소집해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스탬퍼드 브리지에서 바이킹들을 무찌르고 바이킹들에게 다시는 영국을 침공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바이킹 시대를 끝낸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윌리엄쪽으로 불던 풍향이 영국쪽으로 불기 시작하면서 [[노르만 정복|윌리엄이 침공해왔다]]. 해럴드는 하르드라다와의 전투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병력으로 윌리엄에게 맞서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만족을 상대로 시종일관 우세를 점하지만 '''또또''' 운이 나쁘게도 눈 먼 화살에 한 쪽 눈을 맞고 고작 재위 9개월 만에 전사하였고, 지도자를 잃은 잉글랜드군 병사들은 결국 [[헤이스팅스 전투]]에 패배해 월리엄 1세를 왕으로 하는 노르만 왕조가 들어섰다. 이후 앵글로색슨 왕조와 영주들을 몰아내고 노르만 왕족과 영주들이 잉글랜드의 지배계급을 차지한다. [[공작(작위)|공작]], [[백작]], [[자작(작위)|자작]] 등으로 이어지는 작위가 있었던 대륙과는 달리 브리튼 섬에서는 전통적으로 여러 앵글로색슨 왕국이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대치하고 있었고 통일 이후에도 세력이 비슷한 영주들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어서 영주들을 모두 통제하기가 어려웠는데[* 프랑스와 같이 친족들을 영주들의 우두머리인 공작 등으로 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노르만 정복 왕조 이후에는 프랑스와 영국 양쪽에 넓은 영토를 가진 강력한 노르만 영주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의 영향력이 컸다. 그러나 앵글로색슨족은 이번에도 살아나는 데 성공하는데, 노르만 왕조가 [[스티븐 왕]]을 끝으로 단절되고 [[헨리 2세]](헨리 플랜태저넷)가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면서 프랑스의 절반과 잉글랜드를 모두 지배하는 앙주 제국이 성립되었다. [[리처드 1세]] 시기에는 [[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맹활약을 했으나 결국 성지 탈환에 실패했고 내정도 파탄을 맞았고 다음 왕인 [[존 왕]]은 프랑스 왕국 내의 플랜태저넷의 영지를 대부분 상실해 결지왕, 실지왕, 무영토왕이라고까지 불렸다.[* 다행히 가스코뉴를 비롯한 일부 영지는 지켜냈다.] 이런 존 왕의 실정에 귀족들과 국민들이 존 왕을 협박해 받아낸 것이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이다. [[로빈 후드]]가 활동한 것도 이 시기다. 이후 국왕과 귀족들의 다툼으로 [[헨리 3세]]가 반란군에 패해 포로로 잡히기도 했으나 이내 국왕이 반격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보한다. 그 아들 [[에드워드 1세]]는 의회를 최초로 소집했고 웨일스를 복속시키고[* 명목상의 복속은 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인 지배를 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인다.] 스코틀랜드를 잔인하게 정복해 잉글랜드 왕이 스코틀랜드 왕까지 겸하게 되어 스코트인들의 망치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인들의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고 결국 [[에드워드 2세]]가 [[로버트 1세]]에게 패배하면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났다. 이후 [[에드워드 3세]] 시기가 되면 플랜태저넷이 가진 프랑스 내의 잔존 영토에 대한 지배권과 양털을 보유할 수 있는 플랑드르 확보에 더해서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와 스코틀랜드의 프랑스와의 연대 등이 겹치며 [[백년 전쟁]]이 일어났다. 백년 전쟁이 끝나고 1455년에는 랭케스터와 요크의 대결이었던 [[장미전쟁]]이 30년간 벌어져 [[헨리 튜더]]가 승리를 차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