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남후보론 (문단 편집) == 과정 ==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계 복귀를 선언한 [[김대중]]에게 이기택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 총재가 DJ는 영남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DJ 불가론으로 물고 늘어졌다. 재야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는데 특히 대표주자가 바로 [[유시민]]이었다. 자신의 저서인 《97대선 게임의 법칙》에서 김대중 불가론과 더불어 DJ가 아닌 제3의 후보를 내세워야만 정권교체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제3의 후보로는 강원도 출신으로 영호남 지역감정과 아예 무관한 [[조순]] 전 [[서울특별시장|서울시장]]이 주로 거론되었다. ][* 유시민은 영남 출신의 후보, 즉 노무현 만이 [[한나라당]]을 꺾을 수 있다는 논조를 2002년에도 지속적으로 설파했다.] 그러나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40만 표차의 차이로 [[이회창]] 후보에 신승을 거두면서[* 물론 나라 경제가 거의 망하다시피한 1997년 [[외환위기]], [[이인제]]의 독자출마에 따른 영남표 분산 및 보수진영의 분열, 이회창 아들들의 병역의혹, 충청도와 보수진영을 끌어들인 [[DJP연합]] 등 다양한 변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이회창에게 불리한 악재들을 쏟아냈는데도 겨우 40만표 차로 석패했다는 것은 [[기울어진 운동장/정치|정치구도가 민주당에게 불리하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물론 이회창 후보의 이미지가 좋고 대쪽 같은 행보에 지지율이 높았던 것도 맞다. 이회창이 은퇴한 이후로 보수정당은 이만한 역량의 후보를 좀처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한동안 들어갔다. 하지만 [[제16대 국회의원 선거|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영남을 석권하고 수도권에서 선전해 [[새천년민주당]]에 승리를 거두고[* 출구조사에서는 민주당이 제1당으로 예측됐지만 개표결과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한나라당이 133석을 가져가며 제1당이 되었다. 다만 출구조사는 전통적으로 실제 결과와 무관하게 여당이 우세하다는 결과인 경우가 많다.], 대통령 임기 말에 [[최규선|터져나온]] [[옷로비 사건|온갖]] [[이용호 게이트|비리]]들이 조금씩 레임덕을 가속화시키고 있었고, 결정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세 아들이 비리를 저지르다 걸린 이른바 ‘홍삼 게이트’[* 김대중 전 대통령의 [[김홍일(1948)|세]] [[김홍업|아]][[김홍걸|들]]이 ‘홍’ 자 돌림을 쓰기 때문에 그들을 일컬어 홍삼이라고 불렀다.]를 비롯한 각종 게이트 사건으로 [[국민의 정부]]가 [[레임덕]]에 들어서자 소장파 측에서는 국민참여경선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그 이후 치러진 경선에서 초반에는 이인제 대망론과 [[충청 대망론]]을 등에 업은 [[이인제]] 후보가 [[새천년민주당]]의 후보로 무난하게 올라갈거란 예측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광주광역시]]의 경선 직전 [[문화일보]]의 설문조사에서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을 아주 근소하게 앞서는 결과가 나왔다. 이 결과 하나로 광주 경선에서는 [[전략적 투표]]로 노무현이 경선에서 승리하는 이변이 일어나게 된다. 이후 [[노풍#s-2]]을 일으키며 민주당 경선을 뚫었고, 결국 대선에서도 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영남후보론은 '''킹메이커'''라 불리는 [[김윤환(1932)|김윤환]](허주) 전 의원의 구상이기도 했다. 이회창에게 [[토사구팽]] 당한 복수를 하기 위해 [[박지원]]과 함께 추진했던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