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영락제 (문단 편집) === 비판 === 대체적으로는 훌륭한 황제 중 한 명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만, 실책을 많이 저질렀고 비판점도 많이 존재한다. 일단 영락제의 [[숙청]]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지나치게 잔혹했다.[* 일례로 영락제가 자신이 숙청한 정적들의 딸들을 강제로 기방에 보냈고, 그녀들이 남자들에게 겁탈을 당해 임신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웃으면서 '''"어린 것들이 크면 좋은 돈벌이가 되겠구나."'''라고 말할 만큼 냉혹한 인물이었다. - 출처: 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무엇이 부족한가/ 장홍지에 지음/ 정광훈 번역/ 북폴리오] 게다가 그 대부분이 아버지 [[홍무제|주원장]]처럼 어느 면에서는 그보다 더 심하게 안 해도 되는 불필요한 숙청을 한 것이라 더욱 문제다.[* 당장 주원장 때 숙청된 남옥, 호유용 등 공신들에 대한 평가는 어쨌건 안타깝지만 불가피했다는 주장이 우세하지만 영락제 때 숙청된 관료들에 대해서는 동정론이 압도적이었다. 또한 똑같이 쿠데타로 왕위에 오르고 영락제와 비슷한 인생을 보낸 태종 이방원도 외척에 대한 트라우마로 자신을 도운 처가와 사돈인 심온을 숙청하였지만 처신을 잘한 조영무와 이미 힘이 없는 하륜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공신들은 실권이 없는 청외직으로 좌천시키거나 은퇴를 권유하는 비교적 온건한 방식으로 처리했다. 물론 태종은 그전에 죽인 사람들이 만만찮게 많긴 했다만.] 특히 [[방효유]] 일족에 대한 처형은 ('''물론 이게 사실이었다는 전제하에서''')[* [[정난의 변]] 문서 중 임오순난 부분 참조.] 악명이 높은데 물론 방효유 본인이 대놓고 연적 찬위[* 그냥 영락제가 군주라는 것을 부정한 수준이 아니라 영락제 면전에서 쓰기 싫다며 붓과 종이를 내던졌고, 억지로 쓸 때 '''연나라 도적놈이 제위를 찬탈했다'''고 쓴 것이다. 대놓고 모욕하는 것은 물론 역쿠데타를 선동한 셈인데, 이 정도면 영락제가 아니라 어느 사람 좋은 군주라고 해도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 등의 글을 쓰는 등 도전한 이상 죽이는 것까지야 전제 군주제인 명나라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일가족, 친척, 친구, 마지막에는 거주하던 마을 전체 주민[* 주민들은 [[방효유]]랑 같은 지역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아침에 일어나 끌려와 그 자리에서 칼을 맞고 즉사했다.]들을 끌어와 방효유 앞에서 차례대로 죽인 것은 명백한 잔혹행위에다 학살이라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물론 중국에서는 황제에게 거역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을 연좌하는 일이 흔했지만 진짜 반역이 아니면 당사자만 처벌하는 게 보통이고 가족은 기껏해야 추방만 했으며, 반역을 했다고 쳐도 영락제 수준으로 마구잡이로 잡아죽이는 경우만큼은 거의 없었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잔혹했을 지가 답이 나온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바른 말 하면 진짜로 목숨을 거두어가는 바람에 명나라에는 충언하는 사람이 잘 나오지 않게 되었고, '''그 대가는 이후 명나라와 주씨 황족들이 치르게 되었다.'''[* 다만 영락제가 방효유의 십족을 멸살했다는 이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이론도 있다. 방효유를 처형한 것까지는 역사적 사실이 맞지만 그 가족까지 몰살시켰다는 것은 과장이라는 것이다. 십족 멸살에 대한 일화는 [[청나라]] 초기 장가화(張嘉和)가 쓴 황명통기직해(皇明通紀直解)라는 사찬사서에 보이는 정도이고, 정작 '''명 왕조의 정사인 명사 방효유전과 명실록, 작중지(酌中志) 등 명나라 관련 사료에서는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항목에서 서술하고 있듯이 아무리 역적이라지만 직계가 아니면 손대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고, 직계도 성인 남자만 사형하지 나머지는 노비로 삼는 것으로 그쳤으며, 방효유의 사촌동생이 타지에서 군역 가 있느라 살아남았다는 것을 봐도 방효유의 일족이 모조리 절멸되었다는 기록과는 상충된다. 당장 마을 주민들까지 끌어다 죽이는 판인데 군역 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봐 준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겠는가. 특히 명사는 명 왕조의 공식 역사 즉 정사인 동시에 '''명 왕조를 멸망시킨 정복왕조 청에서 편찬한 사서'''다. 대놓고 반역을 모의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죄로 한 사람의 일족이 몰살당한 흑역사가 있었다면 어떻게든 전 왕조의 흠결을 드러낼 필요성이 있었던 청 왕조에서 당연히 놓칠 리 없다. 때문에 현대에는 영락제가 방효유의 십족을 멸족시켰다는 이야기를 부정하는 시선도 있다.][* [[명희종]]실록 권22에 영락제에 의해 방효유의 십족이 주멸되었다는 언급이 있긴 한데, 이것도 영락제 당대도 아니고 거의 2백 년이나 지난 뒤의 기록으로 과장이나 왜곡이 첨부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또한 영락제의 지나친 대외 활동은 겉만 번지르할 뿐 딱히 실속은 없었다는 주장도 많다. 대외 원정해서 명의 위상을 떨쳤다곤 하지만, 정작 그게 이후의 명에 어떻게 큰 도움이 되었는가에 대해선 물음이 남고[* 물론 이는 명의 후대 황제들이 재정 문제 등으로 딱히 영락제의 대외 정책을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제3의 건국?--] 국가 재정만 악화되어 후대 황제들의 부담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주요 주장이다. 위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그는 한평생 몽골 원정에 매진했고 정화의 대항해 또한 그의 시대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대외 활동은 겉보기에는 화려해 보일지 모르지만 원정을 통한 실익은 거의 없었고 결국엔 나라 재정과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게 된다. 특히 정화의 항해 같은 경우는 명나라 스스로도 너무나 실익이 없어서 그 후로 두번 다시 같은 짓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몽골 원정 역시 몽골부족들을 명나라 영향권 아래에 복속시킨다던가, 몽골족을 몰살하여 오랫동안 국경을 안전하게 만든다던가 하는 구체적 성과 자체가 그닥 없다. 명나라의 최전성기라 불리는 영락제의 치세지만 당시에 명나라는 결코 부유하거나 평온하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는 내부적으로 기근과 흉년, 천재지변, 전염병이 계속되었고 영락제가 일으킨 잦은 전쟁으로 인한 징병과 높은 세금을 견디다 못한[* 이 당시 명나라 농민들은 식량이 부족하여 초근목피로 연명해야했고 세금과 징병을 견디지 못하고 도주하여 유랑하는 유랑민이 되거나 처자식을 파는 사례가 빈번할 정도로 삶이 매우 어려웠다.] 농민들의 폭동과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물론 영락제는 이 반란들을 잔혹하게 진압했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영락제의 말년에 일어난 반란 중 가장 큰 민란은 산동 지방에서 일어난 당새아의 난인데 이 당새아의 난은 산동 지방의 농민 수만명이 가담하여 들고 일어나 산동 지방 전체를 휩쓸었다. 특히 영락제가 보낸 진압군이 초반에 참패하고 진압에 실패하여 다시 대규모의 진압군을 보내고 많은 사상자를 내서야 겨우 진압했을 정도였다.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즉, 영락제 시대의 [[무제(전한)|발전된 것처럼 보인 모습은]] [[건륭제|빛좋은 개살구]]였다는 것. 이러한 모순의 심화가 [[정강의 변]]과 함께 '''한족 왕조의 2대 치욕'''으로 평가받는 [[토목의 변]]이 일어나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영락제 시기 동몽골을 견제하기 위해 서몽골([[오이라트]]) 수령들에게 왕호를 내리고 군사 연맹을 맺는 등 많은 지원을 해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흥기한 오이라트가 토목의 변을 일으켰다.] 또한 황제 독재권의 강화를 위하여 [[환관]]들에게 지나치게 큰 권한을 주었는데 이로 인해 후대의 환관들이 전횡을 부릴수 있는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 또한 강하다. 처음 태조 주원장은 환관들이 권력을 가지거나 요직을 맡지 못하게 했다. 또한 환관들이 글을 알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미 글을 아는 환관들도 가차없이 내치거나 죽였다. 이는 잔혹하지만 그래도 환관들을 글자 그대로 황제의 손발로 만들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건문제 때까지 환관들의 업무는 황제를 보좌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를 따라다니면서 이런저런 잡다한 일이나 해주는 심부름꾼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정난의 변'으로 철폐되는데 조카를 몰아내고 즉위한 영락제에 대한 [[사대부]]들의 비판과 저항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때 명의 많은 사대부들이 영락제에 협력하기를 거부했고, [[방효유]]와 같이 끝까지 영락제를 비판하다가 십족이 처형된 사례도 있었다. 그래서 영락제는 이러한 사대부들에 대한 불신으로 인하여 사대부(=못 믿을 놈)들이 장악한 조정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는 대신 자신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환관들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거기다 영락제는 건문제 축출과 정적들의 감시와 제거, 사대부와 군부, 관리 등의 신하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환관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 [[소련]]의 [[KGB]] 비슷한 성격의 동창이라는 [[비밀경찰]] 제도를 활용하였다.[* 사실 비밀경찰 제도는 [[홍무제]] 때부터 있었다. 홍무 15년에 금위군을 개편하면서 설치한 금의위가 바로 그것이다. 동창과의 차이라면 외신(환관이 아닌 일반신하)인 무관이 우두머리라는 것. 주원장 역시 사람을 잘 못 믿고 유방 이상의 숙청을 감행했었는데 그 도구로 '''유용히''' 쓰였다. 일화가 있는데 어느 관리가 지인들을 불러 연회를 주최한 후 다음날 홍무제를 만났는데 홍무제는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 관리는 누구를 불러 언제부터 언제까지 무슨 음식을 먹었다는 등 아주 자세하게 말했고 홍무제는 거기에 '''자네는 참 정직하구만!''' 하고 만족하면서 그 관리 앞에 뭔가를 내밀었다. 그건 바로 '''어제 연회가 그대로 그려져 있던 그림이었다.''' 이 관리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한가지 상기할 점이 있는데 금의위 같은 경우 원래 홍무 20년에 그 폐해로 말미암아 홍무제가 폐지했다는 것이다. 헌데 영락제가 즉위하면서 다시 부활하게 된다. 그것도 권한이 더 강화된 채로. 거기에 동창까지 만들었으니...어지간히 불안했던 모양이다.] 이는 환관들이 명 왕조 멸망 때까지 권력을 전횡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주었고, 실제로 명 왕조는 후한, 당과 함께 환관들의 전횡이 가장 심했던 왕조 중 하나였는데, 명나라의 멸망에 일조한 [[유근]], [[왕진(명나라)|왕진]], [[위충현]] 등은 모두 환관 출신이다. 환관의 권한이 얼마나 컸는지, 그리고 그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알 수 있다. 결국에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될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해졌다.[* 다만 이는 환관들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황제들의 무능함과 무책임이 컸다. 실제로 유근은 그의 횡포가 도를 넘어선 것을 알게된 정덕제의 의해 숙청되고 위충현도 천계제 사후 즉위한 숭정제에 의해 숙청된 것만 봐도 황제들의 권력이 결코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진과 위충현은 정통제와 천계제가 그들에게 휘둘리며 처벌을 하지 않아서 행패를 마음놓고 부렸던 것이다.] 이들은 자국에서만 욕심을 채우는 걸로는 부족했는지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으로 가서 은 내놓으라며 깽판을 쳤고, 조선에서는 명나라 환관이라면 이를 갈았다. 또한 명 제국의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진 점도 비판이 있다.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한 이유야 당연히 그 당시 기준으로는 영락제 본인의 본거지로 세력을 옮기는 편이 그에게는 훨씬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자주 했던 영락제의 입장에서는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기에도 북경이 남경보다 훨씬 나은 곳이었다. 그러나 북경의 수도로서의 지정학적 위치는 유목민계 정복왕조 입장에선 훌륭하지만 한족왕조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실제로 북경이 수도가 된 역사는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 유목민족들이 세운 [[정복왕조]]일때 였고 한족왕조는 단 한번도 수도로 삼지 않았다가 명나라가 최초사례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최전방에 수도를 두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중국이 강력해서 유목세력들에게 계속 공세를 퍼붓는 입장이라면 몰라도 중국이 쇠약해질때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는데 북방의 [[몽골족]]과 [[만주족]] 등이 세력을 떨치면서 명은 수도가 적군의 근거지와 너무 가까워서 무방비로 노출되고 공격받는 사태가 자주 벌어지게 되었다.[* 나중에 [[토목보의 변]]과 경술의 변에서 북경이 몽골군에게 공격당하고 말기에 청나라군이 북경을 공격하면서 영락제의 북경 천도가 큰 실책이 되었음이 드러난다.] 한마디로 훗날 명나라의 멸망을 부른 무능한 황제들의 막장 행태로 대표되는 [[국가 막장·멸망 테크|국가 막장 테크]]의 씨앗들이 이미 영락제 시절부터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영락제는 [[명나라]]판 [[세조(조선)|세조]]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세조와는 매우 유사한 점이 많았었는데 집권 과정은 물론이고 서로의 손자인 [[선덕제]]와 [[성종(조선)|성종]]이 명군이며 증손자인 [[정통제]]와 [[연산군]]이 암군이었다.[* 그래도 정통제는 2번째 집권했을 [[천순제]] 때는 선정을 펼치며 원나라부터 내려오던 악습을 없애는 등 연산군과 비교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군사적 업적이 많고 국가 체제를 완성시켰다는 점까지 보면 거의 [[도플갱어]] 수준이다. 그나마 조선의 세조보다는 나은 점이 있는데 일단 영락제의 외정 업적은 [[중국사 관련 정보|중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크다.[* 실제로 영락제 이후 명나라는 더이상 주변국들에게 패권을 행사하거나 정복 전쟁을 하지 못하고 영토 유지에만 매달리게 되었다.] 또한 영락제는 환관에게 힘을 실어주었을망정 세조처럼 자신의 정치력만 믿고 유력한 공신들을 방조하지는 않았다.[* 세조는 나중에서야 공신들의 힘이 커져 왕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부랴부랴 [[구성군]], [[남이]] 등 신공신을 양성했지만 이들 모두 기존 공신 세력에 밀려 몰락하는 등 결국 실패로 끝났다.] 물론 집권 과정의 부당함과 무자비함, 저지른 실책은 세조랑 닮고 스케일에서는 더 심해서 욕을 먹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